고조선시대에는 선도(仙道)가 주된 이념으로 선도의 핵심가치는 고조선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재세이화입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는 개인의 인격완성을 목표로 홍익인간을 제시하고 공동체의 목표로 양심이 잣대가 되어 사회 시스템이 운영되는 사회인 재세이화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줄여서 홍익인간으로만 사용할 때는 홍익인간은 중의적 표현이 됩니다. 개인의 인격완성을 나타내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홍익인간과 공동체의 목표가 되는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념으로 국가를 통치했기에 국가의사결정도 의사결정 구성원 모두가 찬성을 해야 결정이 되는 화백(和白)제도를 시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화영 교사(계산공고)
이화영 교사(계산공고)

그러나 전통사상인 홍익인간 이념의 쇠퇴로 고조선이 망하고 삼국시대에 들어서자 부족 연합적 형태의 정치를 하고 있던 삼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족의 대표들이 국익(國益)보다는 부족과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일이 늘어나면서 고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던 화백(和白)에 의한 의사결정이 어렵게 됩니다. 따라서 통치자인 임금이 부족들의 이해관계 충돌로 의사결정의 어려움을 겪게 되자 임금은 필요시에는 힘으로 부족대표들을 지배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을 갖기를 원하게 됩니다.

쇠퇴한 전통사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기에 어려우므로 왕족은 새로운 외래사상인 불교를 자신들의 지배이념으로 받아들여서 왕권을 강화합니다. 마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새로운 사상인 기독교를 공인하여 자신의 지배이념으로 삼아 영주들을 단결시키고 분열된 로마제국을 재통일했듯이 백제와 신라는 왕족에 의해 불교가 공인되고 왕권이 강화되어 불교가 사상의 구심점이 됩니다.

그러나 부족들의 힘이 강했던 고구려에서는 외래사상인 불교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되자 전통사상인 선도와 유사한 다른 외래사상인 도교를 수입하는 노력을 했으나 사상의 구심점을 만드는 데 실패를 합니다. 따라서 강력한 권력으로 통치하던 연개소문이 죽자마자 사상이 분열되어 있는 고구려는 내분으로 망하게 됩니다.

백제는 미륵불교를 받아들여 임금이 곧 미륵불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내어 강력한 왕권강화를 이루지만, 뿌리 깊은 전통사상과의 융합이 없는 불교의 독주로 사상의 뿌리는 허약해지고 뿌리 약한 나무가 쉽게 뽑히듯이 백제도 또한 내부분열로 망하게 됩니다.

신라는 비교적 전통사상의 뿌리가 강해 삼국 중에서도 가장 늦게 불교를 도입하였습니다. 왕권강화를 위한 불교공인과정에서도 이차돈의 죽음이 일어날 정도로 전통사상의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중 살생유택(殺生有擇)에서 보는바와 같이 전통사상과 외래사상인 불교와의 융합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사상의 뿌리가 튼튼해져 삼국의 싸움에서 살아남게 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전통사상과 융합된 불교사상은 사라지고 정토불교가 융성하게 됨에 따라 백제말기와 같이 사상의 뿌리가 허약해지게 되고 이에 따라 분열이 일어나고 망하게 됩니다.

고구려 유민과 거란, 말갈, 돌궐족이 연합하여 세운 “밝은 해”라는 뜻을 가진 발해도 초기의 전통사상에서 벗어나 불교화엄종을 지배이념으로 하여 왕권강화를 추진한 것이 다른 종족의 반발을 불러와 내분으로 거란족의 야율야푸치에게 망하게 됩니다. 후고구려의 궁예도 미륵불교로 왕권을 강화하다 호족들의 반발로 물러나고 전통사상과 불교를 융합한 도선의 사상을 이어 받은 왕건이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 고려를 건국하게 됩니다.

고려 초기에는 전통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운영되었다는 것을 팔관회(八關會)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팔관회는 훈요십조에서 '천령 및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대회'라고 그 성격을 밝히고 있듯이 이것은 불교적 행사가 아니라 고조선부터 내려온 제천의식의 맥을 이어온 행사입니다. 행사시기도 개경에서는 11월 15일, 서경에서는 10월 15일에 행사를 한 점으로 보아 동맹, 무천의 맥을 이은 것으로 보입니다.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간 서긍(徐兢)도 자신이 관찰한 바를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팔관회는 고구려의 동맹제(東盟祭)에서 유래한 것"이라 밝혔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고려초기에는 표면으로는 불교가 사상의 구심점으로 보이지만 내용은 전통사상과 융합된 불교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광종 때에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유학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함으로써 호족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왕권에 직속하는 관료중심으로 정치권을 재편하고 유학으로 사상을 통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합니다. 이후로 고려는 전통사상, 불교사상, 유교사상이 대립과 공존을 하면서 세 가지 사상을 포용하는 새로운 사상의 탄생을 기대했으나, 성급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실패에 따른 전통사상의 쇠퇴로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한 사상통합은 힘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도교, 불교의 이론이 접목되어 완성된 성리학이 수입됨에 따라 우리가 주체적으로 사상을 통합할 기회를 놓치고 성리학에 우리의 정신을 내주게 됨으로써 고려는 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묘청의 실패를 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사연구초'에서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1대 사건(朝鮮歷史上一天年來第一大事件)”이라 평했습니다.

고조선의 멸망 함께 전통사상인 홍익인간 이념의 쇠퇴로 화합과 공존을 중시하는 부족연맹체제는 점차 사라지고 왕권이 강화된 중앙집권체제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질서를 위해 왕족은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습니다. 삼국이 왕권강화를 위해 수입한 불교에 의해 패망의 길을 걸었듯이 고려도 왕권강화를 위해 수입한 유교에 의해 패망하게 됩니다. 이것은 주체적 사상의 정립 없이, 정신을 수입된 사상에만 의존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어항의 물을 갈아줄 때 기존의 물과 새로운 물을 반씩 섞어서 물갈이를 해야 하듯이 전통사상과 새로운 사상의 융합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융합보다는 새로운 사상으로 대체하려고 했기에 사상의 뿌리가 약해졌고 사상의 뿌리가 약한 나라는 내부 분열이 일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모든 국가의 패망 원인에는 항상 내부분열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내부분열의 원인으로는 언제나 사상의 분열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사상의 대립과 공존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 교훈은 전통사상을 구심으로 새로운 사상을 융합해야 국가적 미래가 밝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사상인 홍익인간 이념을 교육기본법의 교육이념에서 삭제하자는 법안을 발의하는 일이 생기고 이에 동조하는 세력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우려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잘 살펴서 홍익인간 이념이 구심이 되어 다른 사상들이 융합된 주체적 사상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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