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는 자연과 역사, 사람의 숨결이 어우러져 걷기 명상을 하기 좋은 길들이 많다. 경기 강화도에는 강화나들길 19코스가 있는데 그중 8코스는 서해안 갯벌을 따라 초지진과 동막해수욕장을 오가는 8코스는 일명 ‘철새 보러 가는 길’이라고 불린다.

출발점에서 만난 초지진.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점령당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파괴되었고, 1875년 일본 운요호 사건 때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완전히 무너졌다. 지금의 초지진은 1970년에 복원했다. 

초지진 측면에 있는 소나무의 수령은 400년 정도. 1656년 효종 7년 홍중보가 초지진을 설치할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신미양요와 일본 운요호 사건 때 포탄에 의한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 측면에 있는 소나무의 수령은 400년 정도. 1656년 효종 7년 홍중보가 초지진을 설치할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신미양요와 일본 운요호 사건 때 포탄에 의한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tvN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 첫 회에서 미군의 최신 함포 앞에서 심지에 불을 당겨 쏘는 구식 총과 창, 칼로 끝까지 맞서며 끝까지 장렬히 죽어간 조선군을 보여줬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초지진 소나무와 성벽에 남은 포탄 흔적.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 소나무와 성벽에 남은 포탄 흔적. [사진=강나리 기자]

1871년 6월 10일 미군은 약 2시간 동안 맹렬히 함포 사격을 했고 오후 4시경 초지 돈대에 오를 때는 조선군을 파괴시킨 후라 전투 없이 입성했다고 적혀있다.

당시 미군의 슐레이 대령은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초지진 성벽.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 성벽. [사진=강나리 기자]

너무나 작은 규모의 초지진에 올라 성벽을 따라 걸으며 당시를 그려보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초지진 외곽에서 바라본 초지대교와 갈매기들.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 외곽에서 바라본 초지대교와 갈매기들.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에 들어가는 문.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에 들어가는 문.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에서 바라본 김포시.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에서 바라본 김포시.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은 규모가 작아 성벽을 따라 걸으면 10분이면 충분하다.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은 규모가 작아 성벽을 따라 걸으면 10분이면 충분하다.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 성벽 내부.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 성벽 내부.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 성벽 위에서 바라본 초지대교.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 성벽 위에서 바라본 초지대교.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 성벽 위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 성벽 위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 안에 복원된 대포. 사정거리는 700m로, 조선 영조때부터 주조해 사용했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했다. [사진=강나리 기자]
초지진 안에 복원된 대포. 사정거리는 700m로, 조선 영조때부터 주조해 사용했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했다. [사진=강나리 기자]

 

가까이에서 본 대포. [사진=강나리 기자]
가까이에서 본 대포. [사진=강나리 기자]

 

대포 전체 모습. [사진=강나리 기자]
대포 전체 모습. [사진=강나리 기자]

 

옛 초지진의 초지돈대 모습을 찍은 사진들. [사진=강나리 기자]
옛 초지진의 초지돈대 모습을 찍은 사진들. [사진=강나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