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국학원(원장 권나은)은 5월 7일 제211회 국민강좌에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이종호 박사를 초청하여 “중국의 화하족과 동이족의 차별성2-중국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파헤치다”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이날 강연은 국학원 전용 유튜브로 공개했다.

이 박사는 먼저 유전자 분석에 따른 동이족과 화하족의 차이를 설명했다.

국학원은 5월 7일 제211회 국민강좌에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이종호 박사를 초청하여 “중국의 화하족과 동이족의 차별성2-중국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파헤치다”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사진=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국학원은 5월 7일 제211회 국민강좌에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이종호 박사를 초청하여 “중국의 화하족과 동이족의 차별성2-중국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파헤치다”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사진=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한국인의 머리뼈 특징은 머리의 길이가 짧고 높이가 매우 높다.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단군고조선연대) 유적에 나온 뼈를 보면 정수리가 높고 평평한 얼굴을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고대 동이족(고동북유형)의 특징이다. 화하족인 황하 중류의 지류인 앙소인은 중도형이다. 이마도 곧지 않고 젖혀졌고 머리뼈가 높으며 얼굴뼈도 높다. 그래서 앙소인과 동이족은 다르다.

유전자 분석 결과 홍산문화 선대로 갈수록 형질인류학적 관점에서 고동북유형으로 분류된다. 고조선시대의 선대로 인식하는 소하연문화의 인골들도 고동북유형이다. 고대 중국 중원지역의 한족으로 볼 수 있는 고화북유형이나 고중원유형이 아니다.

반면에 고조선과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하가점하층문화에서 고동북유형과 고화북유형이 섞여서 나오며 남산근, 흑석구, 용두산 등 하가점상층 문화에서 고화북유형, 고몽골고원유형이 발견되어 홍사문화나 소하연문화단계, 하가점하층 전기와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기후가 바뀌어서 하가점 하층문화가 무주공산이 되어 남쪽의 중국인들이 와서 살았다. 하가점 상층문화는 유목생활을 했지만, 홍산문화 소하연문화 하가점하층문화는 농경문화가 주류이다. 하가점하층문화말기(기원전 15세기)에 갑자기 사라진다. 기후변화로 농경이 어려워지고 외부요인이 개재된 것이다.

고홍산시대부터 하가점하층에 이르는 시기에 요하(요서)지역에서 홍산, 소하연, 하가점 하층 문화를 건설했던 종족은 현대 한국인과 친연성이 있다. 역사시대 이후 요하(요서)지역에 주로 거주했거나 통치했던 집단은 홍산시대인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역사시대 이후 문헌으로 추적할 수 있는 시대에 요하 지역에 거주했던 종족과 그 이전에 거슬러 올라가 고고학이 다루는 시기에 요하지역에 거주했던 종족은 다를 수 있다. 과거는 한국인과 같은 DNA를 갖고 있고 지금은 다를 수 있다.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이어 이 박사는 빗살무늬로 동이족과 화하족의 차이를 설명했다.

빗살무늬 토기와 같은 시기 중국은 채도, 흑도를 만들었지만 한국은 빗살무늬, 민무늬 토기를 만들었다. 빗살무늬는 중원으로 내려가지 가지 않고 우리 쪽으로 왔다. 동이족은 빗살무늬를 가지고 우측으로 내려왔다.

다음으로 옥기로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상류층만 옥기 매장, 일반인은 토기 매장을 했다. 우하량에서 옥기가 가장 많이 나왔다. 토기가 아름다웠어도, 귀족은 옥기 한두 개만 매장했다. 그것은 동이족은 옥을 신(神)과 통한다, 천손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옥은 우하량에서 450킬로미터 떨어진 수암옥을 사용했다. 7000년 전 당시에 그렇게 먼 곳에서 가져왔다는 것은 그만큼 옥을 귀중하게 생각한 것이다.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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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는 옥귀걸이(결상이식), 곰을 들어 설명했다.

7000년 전 흥륭와 문화에서 나온 옥귀걸이가, 상(은) 은허, 부신 사해유적과 같고, 우리나라 강원도 문암리, 여수 안도패총, 중국 상(은)의 은허와 같은 옥귀걸이가 나온다. 같은 문화이기 때문이다.

동이족의 특징은 곰토템이다. 홍산문화에서 유적이 아주 많이 나온다. 옥으로 된 곰이 많이 나온다.

이 박사는 적석총으로 동이족과 화하족의 차이를 설명했다. 무덤 매장 풍습은 오랜 기간 동안 완고하게 변하지 않는다. 즉 민족 고유의 전통, 민족 집단의 공동참여로 축조됨으로써 무덤을 만든 민족의 유사성을 구분한다. 그러므로 타민족을 정복했을 때 선주민의 무덤을 훼손한다. 분묘가 제사행위의 장소로 자신과 선조와의 계승관계를 확인하는 행위로 간주한다. 한민족은 돌로 무덤을 만들었다. 우하량의 적석총과 한국의 적석총은 똑같다. 중국은 무덤에 돌을 쓰지 않았다. 한무제릉은 퇴토성릉(堆土成陵), 평지에 흙을 쌓아 만든 것이다. 당건릉(측천무후)은 인산위능(因山爲陵)은 산에 굴을 뚫어 만든 것이다.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동이족은 제단과 무덤이 같다. 이것을 동시성이라고 한다.

3층으로 된 원형 제단과 사각형의 적석총으로 하는 독특한 문화양식이다. 적석총은 대규모 석축물(4방면 층계, 정상부 넓고 평탄하여 제단 성격을 지닌다.)로 적석총 전면으로 홍색 소토 및 원형 돌무더기(제사 유적의 일환)를 조성하고, 2개의 적석총 사이에 방형의 독립된 제단을 두었다.

이 박사는 삼재사상으로 동이족과 화하족을 구분했다.

삼수문화는 고구려의 삼족오를 보면 알 수 있는데, 한나라 이전까지 중국과 동일했다. 중국은 주역의 음양오행의 2진수이다. 숫자로 보면 동이족은 기수문화 1, 3, 5, 7, 9이다. 황룡사 9층탑, 법주사 5층목탑, 정혜사지 13층탑을 보듯이 짝수는 아니다. 홍산 지역 출토 용기 및 석등, 탑, 깃대, 계단, 가로등 전등 숫자 대부분이 기수이다. 동이족 지역은 지금도 가로등은 전부 홀수이다. 짝수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중국은 우수 즉 2, 4, 6, 8, 10이다. 감숙성 백의사탑 12층, 중국 불궁사목탑 6층이다. 중국은 중화삼조당 건설하면서 1999년에는 황제 앞에 복숭아가 4개였다. 나중에는 2009년에는 황제 앞에 9개를 두었다. 황제가 동이족임을 극명하게 표현한 것인데 중국도 이 삼수 문화를 알았던 것이다.

고인돌도 동이족과 화하족을 구분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10만개 고인돌 중 우리나라에 8만-9만개 있다. 없애고 지금은 5만 개 정도가 있다. 고인돌은 중원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제주도 가파도 고인돌은 매우 크다. 고인돌을 만들려면 제주도에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렸다. 제주도 하귀리 고인돌은 세계 유일 해중 고인돌이다. 세계 최대의 고인돌은 언양 고인돌 400kg정도 된다.

이 박사는 별자리가 있는 고인돌을 설명했다. 고인돌에 별자리가 있다. 이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한 주술적 의미가 있다. 역법을 만들거나 오차를 바로잡는데 필요했다. 천문학, 역학이 발달했고 이는 전문인 생계보장이 가능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야간 이동, 밤에도 행군 가능했다. 국가의 특급 비밀이다. 이에 우리 쪽에만 있다. 연대를 보면 평남 용덕리 별자리고인돌은 5000년 전, 경기 양수리 두물머리 고인돌은 4,000년 전이나 된다. 중국에서도 동이족 영역에서는 고인돌이 있다.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이 박사는 비파형 동검, 성의 치로 동이족과 화하족을 구분했다.

한국은 조립식으로 비파형, 중국은 일체식이다. 우리나라 비파형은 나중에 세형동검으로 간다. 연대로 보면 비파형 창끝, 비파형 활촉은 4,500년 전, 비파형 옥검은 5,000년 전에 만들었다.

중국과 다른 점은 우리는 성에 치가 있었다. 4,000년 전 중국 하가점하층문화 삼좌점에도 치가 있다. 백암성, 수원 화성에도 치가 있다. 동이족은 화살을 쏴기 때문에 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국은 당나라 때 비로소 치를 도입한다. 중국은 평지에서 마차로 전투를 하기 때문에 치가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어 이 박사는 온돌은 동이족의 문화라고 강조했다.

고려시대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귀족계급은 와탑(臥榻)을, 서민 계급은 대부분 흙 침상으로 땅을 파고 구들을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고 기록했다. 온돌은 난방과 취사를 겸용했다. 그래서 난방이 필요 없는 제주도는 부엌이 바깥에 있다. 온돌은 장수하는 방법이다. 스웨덴의 유명한 장수학자 비망록에 ‘두냉족열(頭冷足熱)’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온돌이 하는 기능이다.

이 박사는 동복에서도 차이가 난다고 설명했다. 동복은 밥그릇인데, 기마인물상 토기 국보 91호에는 말 궁둥이에 동복이 있다. 이는 동이족의 전형적인 유물이다.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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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는 동이족은 편두를 했다고 화하족과 다른 점을 이야기했다. 동이족 지배층은 편두를 했다. 이어 이 박사는 편두와 금관을 관련지어 설명했다. 현재 금관은 세계 10개 중에 7~8개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를 금관의 나라라고 하는 이유이다. 금관은 12세 아이머리용인데 신라 왕 중 12살 미망 사망자는 없었다. 어린이 금관을 쓰기에 불편하다. 봉암사 지증대사비에 법흥왕이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편두라면 금관을 쓸 수 있다.

이 박사는 기본적으로 동이족은 순장을 했다고 설명했다. 순장은 북한 평남 성천군 룡산리에 30여명을 순장한 무덤이 있고, 고구려 동천왕이 248년 사망하여 순장을 하고, 신라 지증왕(502년)에 순장을 금했다는 기록이 있다. 순장은 하가점 상층에서 중원으로 3500년 전 이동하여 은(동이족)에서 시작하여, 서주, 진까지 순장했다. 한에서 원까지는 중단, 명나라 때 부활했다. 순장은 노예를 하기도 했지만, 자원한 사람들이 많았다.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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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는 개마무사도 동이족과 화하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고 설명했다. 옛날에 말을 타고 전투를 할 때 말이 사람보다 커서 말에도 갑옷을 입히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특징이다. 개마무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탱크와 같은 위력을 갖고 있었다. 밀집대형으로 긴 창으로 진격했다. 개마무사의 등장은 승리의 상징이었다. 덕흥리, 안악3호 고분 행렬도에도 나온다. 서양에서 개마무사는 1221년 페르시아의 우르겐지에서 몽고족과 싸울 때 다량의 개마무사가 등장한 것이 최초이다.

중국이 개마무사를 동원하지 않은 이유는 고구려의 제철능력에 있다. 고구려 동천왕이 철기병인 개마무사 5,000명 동원(1,800년 전)했다고 하는데, 개마무사 1인당 말 갑옷 40 kg, 장볍의 갑옷 무게 20kg, 장병의 갑옷 무게20kg, 기타 장비 10 kg을 휴대, 최소한 70kg의 철 소요했다. 5,000명을 무장하려면 350톤의 철(예비량 포함 500여톤 확보)이 필요했다. 이는 당시 어마어마한 양이다. 고구려의 신성(고이산성)이 철광산이고 무순 탄광이 바로 아래에 있다. 그래서 중국이 신성을 제일 먼저 쳤고 고구려는 철통같이 방어하여 막아냈다. 그래서 중국은 철을 얻을 수 없었다. 세계적으로 철제갑주와 승마용 마갑 등이 출토된 것은 대한민국밖에 없다.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동이족과 화하족은 화살로도 구분한다. 동이족은 각궁(맥궁, 파르티안기사법)을 썼다. 무용총에서 뒤로 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개마무사의 단점은 중장기병으로 속도가 느리고 말에서 떨어지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개마무사 보완용으로 경기병을 육성했다. 경기병은 치고 빠질 수 있다. 경기병이 진열에 균열이 갈 때까지 계속 공격한 후 틈이 보이면 개마무사로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다. 보병대 기병은 3대1, 중장기병 대 전체 기병은 4대 6으로 구성되었다. 경기병은 뒤를 돌아서 화살을 쏘는데, 화살이 다르다. 이것이 각궁이다. 각궁 기병용은 80센티미터, 실제 사용 길이는 6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제작기간은 최소한 5년, 크기가 작고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등자가 필요했다. 활의 중간 부분은 물소 뿔로 만들었다. 남방과의 무역로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동이족은 각배와 호형대구를 썼는데, 말을 타고 다녀서 이런 것이 필요하다. 중원에서는 각배와 호형대구가 전혀 발견이 안 된다.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이 박사는 마늘과 쑥, 침을 들어 동이족 독자 의료가 발달했다는 점을 들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곰과 호랑이의 인간 되기인데, 곰은 잡식성이고 초식을 위주로 한다. 동면을 석달간 한다. 호랑이는 육식성인데 마늘과 쑥을 먹으라고 하니 할 수 없다. 쑥, 마늘은 약재로 쓰인다. 중국은 마늘과 쑥을 약재로 쓴 적이 없다. 그러므로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의약, 의술이 있었다. 이것이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발달했다.

침은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됐다. 신석기시대 돌조각인 폄석(砭石), 청동기 시대의 잠석(箴石), 철기시대의 침(鍼)으로 발전했다. 폄석의 재료는 화산산에서 생성되는 흑요석이다.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한 화산산은 백두산, 침술이 이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이런 기록은 중국 쪽에 남아 있다. 《황제내경》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약 2200년 전에 저술한 한의학의 최고경전인 《황제내경》에 “뜸은 북방, 침은 동방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침술은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발전하였고, 한국에서 가장 융성하여 체계화되었다.

이 박사는 복골(卜骨)도 동이족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설명했다. 동물의 견갑골(어깨뼈)에 구멍을 뚫고 불에 구워 점을 치는 골복(骨卜, 갑골점)은 동이족의 전유물, 홍산문화의 전유물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조에도 기록이 나온다. "전쟁을 하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생각한다.“

부하문화, 하가점 하층문화 및 상층 유적에서 복골이 발견된다. 하가점 상층 문화를 이은 상(은)나라를 통해 복골이 다양한 형태의 갑골점으로 바뀌었다. 주나라의 등장으로 중원에서 갑골점이 소멸하고 주나라부터는 주역을 근간으로 하는 서법(筮法)을 활용한다. 홍산-고조선을 이은 만주지역과 한반도, 일본에서는 복골이 계속 전승되었고 동이족의 전통이 강한 부여나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서 발견된다. 한자의 '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상형문자이다. 점복으로 길흉을 점친 것을 판정하는 사람은 정인(貞人), 은나라 말기에는 왕이 직접 정인의 역할을 했다. 점친 뒤에는 질문 내용과 점괘 등을 기록하여 점을 친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놓은 것이 최초의 책(冊)이다.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국학원 제211회 국민강좌. [사진제공=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진태하 박사에 따르면 동이족이 한자를 만든 증거로 집 가를 보면 집 면(宀)자와 돼지 시(豕)자의 합체자로 집 안에 돼지가 있다는 뜻으로 모든 집에서 돼지를 길렀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주도와 강원도에서 근래까지 돼지를 길렀다. 집 밑에 돼지를 기른 이유는 고대인들은 파충류 특히 뱀을 방어하는 일이 관건이었고 동이인들이 뱀의 천적이 돼지라는 것을 발견, 돼지를 집 밑에서 길렀다고 추정한다. 집에서 돼지를 기르는 것을 보고 집 가를 만들었다.

그럴 연(然)은 동이족이 한자를 만든 증거이다. 연자는 고기육(肉)+ 개견(犬)+ 불화(火, 灬)의 3자 합자체로 개를 불에 그슬리는 고기이다. 동이족은 개를 잡을 때 돼지나 닭처럼 뜨거운 물을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불에 그슬리어 잡았다. 연의 자의가 개불고기 연에서 그슬릴 연, 태울 연자로 전의되었다. 동이족은 여름철 삼복에 보신탕을 먹었는데 개를 먹고 나서 '개불고기가 최고라는' 뜻으로 '그슬릴 연'이 '그럴 연'자로 전의되었다고 풀이한다. 한자는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풍습이나 전설이 반영된 표의문자로 만들어졌다. 연(然)자를 처음으로 만든 민족은 중국인이 아니라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임을 증명한다.

이 박사는 언어체계로 화하족과 동이족의 차이를 설명했다. 중국과 한국은 한자를 공동 사용하는데 언어의 체계 즉 문법이 완전히 다르다. 한국어를 비롯한 알타이어계 언어는 주어(S), 목적어(O), 동사(V), SOV언어이고 중국어는 주어(S), 동사(V), 목적어(O)의 어순, SVO언어이다. 중국어도 알타이어계처럼 SOV체계였는데, 인접한 SVO어순인 남방언어들의 영향을 받아서 SVO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한다. 동이족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언어체계를 바꾼 것으로 추정한다.

이 박사는 “과거 동이족을 한민족과 동일 선상으로 무조건 간주하는 것은 무리이다.”라면서 “그러나 한민족은 동이족의 정통 즉 적자로 생각한다. 화하족에 흡수되지 않고 현재까지 동이족의 전통과 풍습을 이어오며 현재의 한민족 근간이 되었다.”고 말했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청동기 시대부터 생겼다고 인식한다. 요하 문명이 발전하고 있을 때 중국, 한국도 없었다. 단지 중국과 한국의 시원문화로서 요하 일대에서 발달된 독자적인 문명권이 있었다.

이 박사는 “요하인들이 문명을 가꾸면서 단군조선보다 거의 1천 년 전에 '신비의 왕국'을 건설했다.”며 “중국이 황제에 대한 연구를 하면 할수록 한민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다. 이를 우리가 선용할 수 있도록 슬기롭게 이용하면 동북공정 등에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