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 년 전 육지와 단절된 섬 흑산도에서 선비 정약전은 어떻게 섬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삶을 담을 수 있었을까? 1801년 신유박해로 흑산도에 유배된 손암 정약전이 흑산도 청년 어부 장창대, 청년 홍어장수 문순득과 만남을 통해 조선의 바다 속을 기록한 《자산어보》의 집필과정을 따라가 보자.

2백 년 전 정약전이 《자산어보》집필했던 흑산도. 사진은 흑산도 선유봉. [사진=문화재청]
2백 년 전 정약전이 《자산어보》집필했던 흑산도. 사진은 흑산도 선유봉. [사진=문화재청]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7일 다음갤러리(카카오갤러리)에서 온라인 전시 ‘정약전과 자산어보, 그리고 흑산도’를 공개했다. 다음갤러리 내 해당 전시( https://gallery.v.kakao.com/p/premium/jasan)는 최근 영화‘자산어보’의 개봉과 더불어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조선시대 최초의 어류학 사전이자 해양생물백과사전인 《자산어보》를 중심으로 섬사람들과의 인연과 삶을 담았다.

전시는 총 5개의 주제로 ▲ 자산어보의 역사적 의미를 다룬 제1부 ‘조선 시대 어류학서, 《자산어보》’ ▲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정약전 형제의 애틋한 형제애와 유배과정을 그린 제2부 ‘1801년, 신유박해와 정약전 형제의 유배’ ▲조선 시대 고지도와 흑산도·우이도 사진을 통해 정약전이 머물던 적거지謫居址를 만나는 제3부 ‘유배인을 품은 풍요로운 섬, 흑산도’ ▲ 《자산어보》 집필을 도운 청년과의 소통을 다룬 제4부 ‘바닷가 청년 어부, 장창대와의 만남’ 그리고 ▲ 정약전의 《자산어보》와 《표해시말》에 담긴 특별한 인연들을 재조명한 제5부 ‘아시아를 표류한 우이도 청년 홍어장수, 문순득과의 만남’으로 구성되었다.

(왼쪽) 정약전의 동생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여유당전서》. (오른쪽 위) 정약용의 둘째아들 정학유가 지은 《운포유고》 중 흑산도의 풍물과 풍속을 읊은 '현산잡시'. (오른쪽 아래)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 도초도 전경. [사진=문화재청]
(왼쪽) 정약전의 동생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여유당전서》. (오른쪽 위) 정약용의 둘째아들 정학유가 지은 《운포유고》 중 흑산도의 풍물과 풍속을 읊은 '현산잡시'. (오른쪽 아래)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 도초 전경. [사진=문화재청]

손암 정약전(1758~1816)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형으로 유배지 흑산도에서 청년 어부 장창대(1792~?)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를 완성했다. 흑산도 주변의 물고기와 해양생물들을 분류해 이름과 모양, 습성, 맛, 건강효능, 그리고 민속과 고기잡이 도구까지 정리했다. 그는 섬사람들에게 덕망높은 선비로 흑산도와 우이도에서 서당을 열어 섬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만난 백성들이 저마다 물고기를 부르는 이름, 요리법, 민간요법 활용이 달라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자산어보》를 기록했다.

그렇다면 섬 이름처럼 《흑산어보》가 아니라 왜 《자산어보》일까? 정약전은 ‘자玆’라는 글자에 '흑黑'의 검다는 뜻이 있을 뿐 아니라 ‘흑산’이라는 이름이 음침하고 어두워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산’이라고 썼기 때문이라고 전시에서는 소개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조선 후기 섬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섬과 유배문화를 새롭게 이해하고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들을 한데 모아 선보인다. 절해고도에 유배 온 낯선 이방인과 섬사람들의 만남과 갈등, 교류 속에서 피어난 옛 선인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정책과 바다를 통제하는 해금(海禁)정책으로 해양활동이 위축되었고, 섬은 육지와 격리된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유배의 땅으로 활용되었다. 16~17세기 섬에 수군진이 집중적으로 설치되면서 섬 유배인들이 더욱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