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짝 내딛어 ‘진짜’바다를 마주하는 법
한 발짝 내딛어 ‘진짜’바다를 마주하는 법
  • 조민조 PD
  • minjocho@naver.com
  • 승인 2021.03.17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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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UBC 울산방송 조민조 PD
UBC 울산방송 조민조 PD.
UBC 울산방송 조민조 PD.

내 유년시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경 중의 하나는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진 바닷가다. 어린아이 걸음으로도 15분이면 갈 수 있었으니, 나는 바다와 꽤 가까운 곳에서 산 셈이다. 햇빛에 잘 마른 고운 모래를 밟을 때면 사박사박한 느낌이 좋았고, 파도가 발목까지 밀려드는 그 경계를 걸을 때면 발바닥이 폭 빠지는 기분이 좋았다. 거기다 바닷바람과 파도소리까지, 지금 돌이켜보면 꽤 과분한 풍경이지 싶다.

자, 여기까지는 사춘기를 지나서야 느낄 법한 낭만이고, 사실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바다만큼 뛰어 놀기 좋은 곳이 없다. 바닷가 노점에서는 삶은 고동을 고깔처럼 돌돌 만 종이에 넣어 팔곤 했는데, 아이들끼리 동전을 모아 그걸 사서는 사이좋게 나눠먹는 게 하나의 재미였다. 바닷물이 많이 들이치지 않는 돌 틈 사이에서 조그마한 게들을 발견하며 즐거워했고, 모래사장에서 예쁜 조개껍질을 줍기도 했으며, 소라껍질을 발견하는 날엔 살짝 귀에 대고 눈을 감아보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소라껍질 안에서 파도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요즘은 바다에서 어떤 낭만과 어떤 놀이를 하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이런 뉴스들만 흘려들었던 것 같다. 바닷가 해안 쓰레기와 바다 속 해양 쓰레기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뉴스 말이다. 태평양 어딘가에 쓰레기 섬이 있는데 여의도 면적의 7배가 넘는다고 하던가.

그런 뉴스도 있었지. 폐사한 고래의 배를 갈랐더니 8kg의 비닐봉지가 나왔다고 했다. 사실 폐사한 동물은 고래뿐만 아니라 바다거북도 있고, 또... 근데 잠깐, 이런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 하루에도 포털 사이트에 몇 건씩이나 올라오곤 하니까. 그리고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충격적이라며 놀라거나, 삶의 방식을 반성한다거나. 나도 미처 거기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딱 그 정도였다.

한 발짝만 더 내딛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풍경을 보게 될까. 궁금증이 일었던 것은 방송 촬영을 하면서 바다 쓰레기를 줍는 엄마들을 만났을 때다. 포항에서 작은 모임을 꾸리고 있는 이들은 맘카페에서 만나 다양한 노(NO) 플라스틱 운동들을 해왔다. 그 활동 중 하나가 ‘바다 쓰레기 줍기’라고 했다. 그리고 촬영차, 정말이지 오랜만에 그들과 함께 바다를 찾았다. 낭만이 가득 찬 과거의 바다가 아니라, 혹은 소름이 오소소 돋는 뉴스 속 바다가 아니라, 그러니까 ‘진짜’ 바다 말이다.

슬프게도 내 눈 앞의 바다는 추억보다는 뉴스 속 현실에 좀 더 가까웠다. 모래사장에는 먹고 남긴 컵라면 용기, 라이터, 담배꽁초, 안경, 비닐장갑, 일회용 마스크, 케이크 상자, 일회용 컵 등, 상상할 수 있는 쓰레기들은 다 있었다. 쓰레기를 주울 때 특히 곤혹스러운 건 조각조각, 아니, 아예 부스러기가 된 스티로폼이었는데 그건 손으로 줍기도 불가능하다. 아무리 잘게 쪼개진다 해도 플라스틱은 녹지 않는다. 미세 플라스틱이 되어 눈앞에서만 사라진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또 있었다. 고작 1시간 줍는 동안에 일본어로 적힌 플라스틱 페트병을 네댓 개 발견한 것이다. 쓰레기 줍기 모임의 회원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반응이었는데, 북한말로 쓴 아이스크림 비닐이나 중국어가 적힌 칫솔도 종종 파도를 타고 떠내려 온다고 알려주었다.

이쯤에서 그 유명한 ‘앨버트로스’가 떠오른다. 앨버트로스는 날 수 있는 새 중에서는 가장 큰 날개를 갖고 있는 새로 유명한데, 양 날개를 펼치면 최대 4미터 정도까지 된다고 한다. 미국의 유명한 환경 운동가이자 사진가인 ‘크리스 조던’은 태평양 한 가운데 섬에서 집단으로 폐사한 앨버트로스를 보게 되었다. 폐사한 새의 배를 갈라보니 거기엔 페트병 뚜껑을 비롯한 수많은 플라스틱 조각들이 있었는데, 그는 이것을 그대로 사진과 영상으로 담았다.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던 ‘미드웨이 시리즈’로 알려진 작품이다. ‘앨버트로스’ 영상을 보다보면 장면 모두에서 아름답지만 비루하고, 행복하지만 비참한 양가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새들 사이의 애정을 확인하는 장면이나,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는 고귀한 장면의 잔혹한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앨버트로스는 플라스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바다가 주는 것을 그대로 믿을 뿐이다. 그들의 조상이 몇 백 만년 동안 그러했듯이”

이는 영상 속 내레이션 중 한 부분이다. 그리고 앨버트로스는 새끼에게 입에서 입으로 플라스틱 덩어리를 건넨다. 새끼를 키워낼 먹이라는 믿음으로. 그런데 이 장면을 유심히 보다가 문득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앨버트로스는 새끼에게 무해하다는 믿음으로 플라스틱을 먹이지만, 우리 인간은 쉽게 쓰고 버린 플라스틱이 결국 미세 플라스틱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의 식탁을 준비한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자, 이제 어떤 결말을 맞을 것인가. 우리는 충분히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야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잔혹한 결말을 피할 수 있다. 그 행동의 첫걸음은 바다로 가서 ‘진짜’ 바다를 마주하는 것이다. 막상 평소와 다른 마음으로 모래사장을 디디게 된다면 그렇게 용기 내어 바다를 찾은 다른 이웃들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듯이.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나도 바다 쓰레기를 줍는 모임에 한 달에 한 번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한 발짝 내딛기 시작했다.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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