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5대 궁궐에 걸렸던 현판들의 본래 위치 등을 도면에 표시하고 현판에 담긴 다양한 내용을 풀이해 이해하기 쉽게 소개한 최초의 책자가 발간되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 시대 궁궐에 걸렸던 현판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수록한 《조선왕실의 현판Ⅰ》을 발간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현판 770점은 지난 2018년에 ‘조선왕조 궁중현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 등재된 바 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시대 궁궐에 걸렸던 현판들에 대한 조사결과를 수록한  《조선왕실의 현판Ⅰ》을 발간했다. 경복궁 근정전 권역의 융문루(위)와 융무루(아래). [사진=문화재청]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시대 궁궐에 걸렸던 현판들에 대한 조사결과를 수록한 《조선왕실의 현판Ⅰ》을 발간했다. 경복궁 근정전 권역의 융문루(위)와 융무루(아래). [사진=문화재청]

이번 책자에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현판 중 경복궁 현판 184점, 창덕궁 현판 91점, 창경궁 현판 44점, 경희궁 현판 41점, 덕수궁 현판 25점과 참고도판(13점) 등을 조사해 현판이 본래 걸려 있었던 건물을 추적한 결과도 함께 수록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궁궐의 여러 전각이 헐리면서 철거되어 별도로 모아 관리되어 원래 걸었던 전각의 위치 파악에 어려움이 있었다. 도록에서는 현판 뒷면에 원래 걸렸던 위치가 적혀 있는 묵서(墨書)와 <경복궁배치도>, <북궐도형>, <동궐도>, <서궐도안> 등의 도면과 회화, 유리건판, 사진 등 시각자료를 비교하여 본래 현판이 걸려 있었던 궁궐과 건물을 추적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궁궐 현판 중에서 시기가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것은 창덕궁 홍문관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1652년(효종 3) 이정영(1616~1686년)이 쓴 ‘옥당 현판’이다. 가장 늦은 시기에 제작된 것은 1904년(광무 6) 덕수궁 화재 이후 제작된 20세기 초 덕수궁에 걸었던 현판들이다.

조선 시대 궁궐의 여러 전각과 당(堂), 문(門), 루(樓) 등의 건물에는 그 성격과 기능에 따라 좋은 글귀를 따서 이름을 짓고 현판으로 만들어 걸어 간판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 밖에도 현판에는 국왕의 선현에 대한 추모나 신하들이나 후손들에게 내린 지침이나 감회를 읊은 시를 비롯하여 조선의 국가 이념과 왕실에서 추구했던 가치관이 담긴 글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덕수궁 정문이던 '인화문(仁化門) 현판'. 본래 걸려 있던 모습을 독일의 개인이 소장하던 1902년 촬영된 새로운 사진 자료를 통해 이번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사진=문화재청]
덕수궁 정문이던 '인화문(仁化門) 현판'. 본래 걸려 있던 모습을 독일의 개인이 소장하던 1902년 촬영된 새로운 사진 자료를 통해 이번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사진=문화재청]

더불어 현판은 선조, 숙종, 영조, 정조, 고종 등 왕이 쓴 글씨와 당대 최고 명필가의 글씨를 받아 장인들이 정교하게 새겼고, 화려한 문양과 조각으로 장식하였다. 특히 왕과 왕세자의 글과 글씨는 120여 점에 달한다. 그중 영조는 오랜 재위만큼 50점에 달하는 가장 많은 어제(御製, 왕이 지은 글)와 어필(御筆, 왕이 쓴 글씨) 현판을 남겼다. 어필과 왕세자가 쓴 예필(睿筆) 현판은 작은 글씨로 어필, 예필이라고 새겨져 있고, 봉황, 칠보, 꽃문양 등을 섬세하게 그린 테두리를 둘러 품격을 높였다. 또한, 사롱(紗籠)이라는 비단직물로 덮거나 여닫이 문을 달아 왕의 글과 글씨로 된 현판을 보호하기도 했다. 이처럼 현판은 건축과 서예, 공예가 접목된 기록물이자 종합 예술이다.

한편, 국립고궁박물관은 올해 종묘, 능원묘(陵園墓), 수원 화성 등에 걸었던 현판도 중점적으로 조사 연구하고, 안료 분석 자료, 사롱 분석 결과 등을 수록한 『조선왕실의 현판Ⅱ』를 12월 발간하여 더 많은 현판을 더 폭넓게 국민에게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