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BTS(방탄소년단) 아미에요. 노랫말에 영혼을 힐링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잖아요. 나도 계속 국학기공강사로서 능력을 키워 BTS처럼 세계로 진출할 겁니다. 영어공부도 시작했어요. (하하)”

브레인명상을 한 이후 새로운 인생을 창조한 김은숙 국학기공 강사. [사진=김경아 기자]
브레인명상을 한 이후 새로운 인생을 창조한 김은숙 국학기공 강사. [사진=김경아 기자]

지난 2일 단월드 홍제센터에서 만난 김은숙(64) 씨는 온 얼굴 가득 웃음과 활기가 떠나지 않았다. 젊은 감각과 건강함을 바탕으로 넘치는 자신감에 빛나는 김은숙 씨는 문화예술 및 생활체육시설인 마포아트센터에서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는 국학기공 강사이다. 지난해 서울시협회장기를 비롯해 세 번의 대회에 선수단을 이끌어 멋진 기량을 선보였다.

아울러 61세에 초등학교 공부를 시작하여 현재 고등학생이다. 졸업 후 뇌교육 특성화대학이자 BTS의 모교인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또는 상담심리학과에 진학할 계획이라고 한다.

김은숙 씨는 지금처럼 건강도, 행복도 스스로 관리할 수 있게 된 2016년 겨울을 잊지 못한다. 60세가 될 때까지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버텨왔는데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각종 성인병과 관절염, 오십견, 허리디스크 협착 등 온 몸이 아팠어요. 마음까지 우울해져서 사는 게 재미없을 정도였죠.”

병원을 다녀오다가 단월드 지도자들이 거리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지친 어깨를 풀어주는 러브핸즈 봉사단을 만났다. “누군가 내 건강을 돌보아 주는 경험이 처음이었어요. 센터에서 세세하게 점검해 주시는데 몸 곳곳이 막혀서 아프지 않은 곳이 없더군요. 원장님이 ‘그동안 못 돌보아서 미안하다고 몸에게 이야기해 주셔야겠네요.’라고 하셨을 때 뭉클해지고 마음이 확 풀리면서 몸도 너무나 편안했어요. 그때까지 너무나 고단한 삶이어서 운동은 엄두도 못 내었죠.”

김은숙 국학기공 강사는 마포아트센터에서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진다. [사진=김경아 기자]
김은숙 국학기공 강사는 마포아트센터에서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진다. [사진=김경아 기자]

김은숙 씨는 가난한 시골집 8남매의 맏딸이었다. 학교 선생님이 되고픈 꿈이 있었지만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부터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해야 해서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1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다른 집에 가서 3년간 식모살이를 하고 17살에 시집을 갔다.

그는 가진 게 없어 빈 몸으로 시집을 갔고 시누이가 빚을 얻어주어 혼례를 치렀다. 육순의 시어머니는 녹내장으로 잘 보지 못하셨고 시아버지도 성격이 불같았다. 남편은 생활력이 좋지 못했다. 시부모님은 물론 시동생, 친정동생들도 그가 품어야 했다. 남의 논에 모내기를 가서 품삯 일을 했으나 여의치 않아 굶는 일이 많았다. 식당일도 하고 마트에서 판매직도 했고 호떡장사 등을 하면서 손발이 짓무르도록 일했으나 가난의 굴레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가난해서 무시당하는 일이 많았고 배운 게 없어 늘 주눅 들어있었어요. 초등학교 교육도 마치지 못해 한글도 맞춤법이 틀리니 어디 가서 글씨 쓰기가 망설여졌죠. 아이들 가정환경조사서에는 ‘중학교 중퇴’라고 했지만 배우지 못한 게 부끄러웠어요.” 스트레스로 가슴이 막히니 ‘담배라도 피워보라’는 주위 권유로 피게 된 담배는 끊기 어려웠다.

단월드에서 브레인명상을 시작하고 처음에는 바쁘다고 자주 빠졌다. 그러나 심성교육을 받았을 때 그의 삶에서 큰 변화가 왔다. “교육 때 처음 내 마음이 어떤지 왜 건강하지 못한지 알겠더군요. 나를 바라보니 주위 가족들 위주로 살았지 ‘나’라는 자체가 없이 살았죠. 겉으로 명랑한 듯 웃었지만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어 항상 외로웠어요. 힘들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밤에 혼자 운 적이 많았죠. 그런데 교육에서 ‘나를 사랑하라’는 울림이 크게 오더군요. 그것이 위로가 되고 감정이 씻겨나가면서 내가 나를 돌보게 되고 우울증뿐 아니라 불면증도 더 이상 겪지 않았죠.” 그는 건강을 돌보는 재미를 알아갔고 담배도 어느 순간 냄새가 역겨워지며 저절로 끊게 되었다.

그는 PBM(파워브레인 메소드) 교육을 받으며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에서 벗어나니 어느새 “마음을 먹으면 못할 게 없겠다”는 의욕이 솟았다. “마지막 과정에서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추었는데 처음에는 어색하더군요. 평생 긴장을 놓고 살아본 적이 없어서요. 그런데 트레이너의 격려를 받으며 점차 마음껏 춤을 추며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어요.”

꾸준히 브레인 명상을 하면서 건강도 회복했고 스스로 관리하면서 젓가락조차 들지 못했던 오십견도 사라졌다. “생각이 바뀌고 의식이 바뀌니 배우지 못했던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원장님이 ‘공부를 하고 싶으면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았어요.’라고 용기를 주셨죠. 그리고 원장님이 공부하던 국가공인 브레인트레이너 자격시험지침서를 제게 선물해 주셨어요.

아이들은 한글도 잘 모르는 데 그런 선물을 왜 받아왔느냐고 하더군요. 그때 ‘왜 안 돼? 하면 되지. 해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마스터힐러 교육을 받으면서 예전의 저처럼 건강도, 희망도 없이 사는 다른 사람에게 저와 같은 기회를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거든요.”

김은숙 씨는 즉각 선택을 하고 초등학교 과정을 운영하는 학교에 등록했다. 가족들은 “그 나이에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 이제 와서 배워서 무엇 하느냐.”고 말렸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중학교 과정을 거쳐 중학교 검정고시를 63세에 통과했다. 그리고 국학기공강사 교육 과정도 착실하게 밟아 3급에 이어 2급 강사 자격을 취득했고 베이비시터와 산모관리 자격도 땄다.

(시계방향으로) 지난해 서울특별시협회장기 국학기공대회 출전모습, 국학기공지도자 2급 승급교육을 마친 김은숙 강사, 중학교 졸업식. [사진=본인 제공]
(시계방향으로) 지난해 서울특별시협회장기 국학기공대회 출전모습, 국학기공지도자 2급 승급교육을 마친 김은숙 강사, 중학교 졸업식. [사진=본인 제공]

“제 선택이 저에게 새로운 인생을 창조하게 만들었죠. 배우지 못해 생활하면서 불이익이 너무나 많았죠. 자존감도 없고 나 자신을 믿지 못해 그냥 포기해 버린 것이 아주 많았죠.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자신감이 붙고 사람들과 대화와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서 드디어 세상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어요.”

그는 2018년 가을부터 대흥동 마포아트센터 앞 광장에서 국학기공을 지도했다. “제가 강사자격을 취득하고 얼마 후 마포아트센터를 담당한 강사님이 사정이 생겼어요. 얼른 제가 맡겠다고 나섰죠. 처음 강사로 서게 되니 떨리더군요. 오래된 회원 분은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도 하시고요.(하하) 새벽같이 일어나 수련지도를 하고 학교를 가느라 아침도 못 먹을 때도 있었지만 신이 났어요.

주 5일 아침마다 만나서 국학기공 지도를 하면서 제 건강도 더 좋아졌고, 무릎관절, 허리 통증에 시달리던 회원들도 건강해졌다며 좋아하셨죠. 국학기공대회에 나가 상도 타고요. 수련장을 가면 회원 7~8분이 먼저 나와서 저를 기다리시더군요. 회원들 눈빛만 봐도 좋고 사랑스러웠어요.”

올해 코로나19로 만나지 못하게 된 회원들이 보고 싶어 김은숙 강사는 인터뷰 당일도 17명의 회원에게 안부전화를 했단다. “회원들이 ‘매일 하던 국학기공을 못하니 죽겠다. 빨리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내년에 우리 꼭 만나자고 약속을 했죠.”

김 강사는 자신의 건강은 병원에서 인증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늘 그의 의무와 같던 가족과의 관계도 바뀌었다. “마스터힐러 교육을 받을 때 트레이너께서 ‘제가 바르게 서면 주변 상황이 달라집니다.’라고 했을 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죠. 그런데 제가 행복해지고 건강해져 제 삶을 살게 되니 아들, 딸들도 일이 잘 되고 친정 동생, 시동생들도 이제는 저를 응원하고 돕습니다.”

김은숙 국학기공 강사는
김은숙 국학기공 강사는 "제 변화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김경아 기자]

김은숙 강사는 “지금이 제 인생의 중반입니다. 이제 시작이니 목표를 세워 끝까지 도전하면서 건강을 관리해서 꼭 이루어나갈 겁니다. 제 목표는 세계로 나아가 뇌교육과 국학기공을 전파하는 활동을 하는 겁니다. 주변 동년배에게 브레인명상을 권하는데 선뜻 선택을 못하더군요. 제 변화를 통해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라고 꿈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