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실보첩[왕실족보]은 조선초기부터 편찬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 때 다시 편찬하나, 오류가 많아 수정이 불가피했지만 국가 재정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친과 관료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왕실보첩의 수정 편찬을 청했고, 숙종 대에 이르러 왕실보첩의 수정은 물론 새로운 보첩까지 편찬하였다. 숙종이 직접 나서서 전란으로 소실된 왕실족보를 재편찬한 것이다. 이렇게 편찬한 왕실족보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욱)은 조선시대 왕실보첩 편찬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숙종이 정리한 왕실가족의 역사와 기록

원창애 저, "숙종이 정리한 왕실가족의 역사와 기록" 표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원창애 저, "숙종이 정리한 왕실가족의 역사와 기록" 표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원창애 지음, 12,000원)을 발간했다. 이 책은 17세기 숙종 대 왕실보첩이 정리, 편찬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살폈다.

이는 『숙종이 정리한 왕실가족의 역사와 기록』의 목차 1. 보첩의 기원, 2. 조선 전기의 왕실보첩, 3. 숙종에게 진상된 이간의 『선원보략』, 4. 숙종 대에 개수한 왕실보첩 『선원록』, 5. 숙종 대 새로 편찬한 왕실보첩, 나오며를 보면 알 수 있다.

저자 원창애는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8년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연구교수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조선시대 과거, 관료 연구 그리고 왕실 구성원 등이다. 논저로는 『조선 왕실의 계보와 구성원』, 『국왕과 양반의 소통구조』(공저), 『국왕과 민의 소통 구조』(공저) 등이 있다.

먼저 조선시대 왕실보첩[왕실족보]의 성격을 보면 이는 전통시대 친족의식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료이다. 성리학적 친족의식이 정착되기 전에는 부계와 모계 양쪽 친족을 모두 중히 여겼다. 따라서 조선 초부터 기록된 왕실보첩은 부계와 모계를 모두 중시하는 등 조선 이전의 전통적 친족의식을 그대로 반영했다.

조선 왕실보첩은 수록 내용이나 형식에 따라서 보(譜)·록(錄)·첩(牒)·도(圖) 등 다양했다. 조선 초기부터 편찬되었던 역대 국왕의 친족만을 기재한 『선원록(璿源錄)』, 역대 국왕의 가족만을 적어 놓은 『어첩(御牒)』, 역대 국왕의 『팔고조도(八高祖圖)』, 국왕과 왕후의 친족을 적은 『돈녕보첩(敦寧譜牒)』 등이 있다. 왕실보첩의 큰 특징은 국왕과의 촌수를 밝혀서 친족 범위 내의 인물만을 수록한 점이다.

그럼 숙종 대에 수정 편찬한 왕실보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저자가 이 시기를 주목한 이유는 예송논쟁을 마무리한 숙종이 왕실 친인척의 면면을 공개하여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고자 『선원계보기략』이라는 새로운 왕실보첩을 편찬하고, 그 과정에서 기존 보첩을 수정 편찬하면서 성리학적 친족의식을 적극 반영하는 등 변화된 양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와는 달라진 왕실보첩의 편찬 과정을 통해 17세기 조선의 사회상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왕실보첩의 편찬에도 정파적 세계관이 투영되었다. 집권자인 남인은 성리학적 친족의식을 수용하면서도 왕실의 특수성이 보첩의 형식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양상이 변화되었다. 즉 서인은 왕실의 특수성보다는 족보의 편의성을 강조하여 사가 족보의 형식과 동일하게 하고 보첩명을 선원록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남녀 구분보다는 적서구분이 우선시되었고, 종통을 앞세워 왕위를 계승한 대군이나 군을 가장 앞에 기재하였다. 즉 성리학적 친족의식이 투영되어 부계 위주의 보첩으로 바뀐 것이다.

요컨대 숙종 대에 수정 편찬된 왕실보첩은 오류 수정에 그치지 않고, 부계 위주, 철저한 종통의식, 적서 차별, 남녀 구별 등 성리학적 친족의식을 크게 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