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보급 앞장선 이윤재,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중 순국

이윤재(李允宰, 1888. 12. 24.~ 1943. 12. 08.) 한글학자는 조선어사전을 만들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했다.

한뫼 이윤재(李允宰, 1888. 12. 24∼1943. 12. 8) 선생은 경남 김해부 우부면 답곡리(현재 김해시 대성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한뫼, 한메, 환산(桓山)이다. 여섯 살 때인 1894년부터 선생은 향리의 서당에서 10여 년 동안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그 재주가 뛰어나 주위에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김해서 합성학교(合成學校)의 교사가 되어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마산의 창신학교(昌信學校)와 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에서 국사와 국어를 교육하였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학교(寧邊學校)에서 교사로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지방의 3·1운동에 앞장서서 주동적 역할을 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게 붙잡혀 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에 출옥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 등 독립운동가를 만나보고 북경대학(北京大學) 사학과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1924년 3월에 졸업했다.

1924년 9월에 귀국하여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육에 종사했다. 1925년에 안창호(安昌浩)가 조직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4월부터 협성학교(協成學校)에서 국어와 국사를 담당하여 교육하면서 허무당(虛無黨) 선언서 발표에 관여하였다.

1926년에 「중국극(劇) 발달 소사(小史)」, 「쾌걸 안용복(安龍福)」, 「조선문(朝鮮文)과 어(語)의 강습을 실행하자」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27년 8월에 「조선사람에게는 조선말 사전 한 권도 없음」을 통탄하고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의 동지들과 함께 국어사전 편찬의 준비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이 해에 민족정신과 민족문화의 발굴·보존·계승을 위한 잡지인 『한빛』을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이 잡지는 “조선 얼굴의 거울, 조선 마음의 거름”이라는 민족사의 자각 위에서 역사, 사회, 전기, 한글 연구논문과 기행문, 수필문 등을 수록하여 민족문화 보급운동을 통해서 독립사상을 고취한 잡지였다. 이 해에 「우리의 수양운동」, 「세계사조와 국민문학」, 「세종과 훈민정음」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29년 10월 31일에 한글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는 날을 택하여, 조선교육협회에 모인 각계 유지 108인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를 조직하고 국어사전 편찬을 위한 편찬위원회 집행위원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 해에 사전편찬의 일로 중국 상해에 망명중인 김두봉을 만나러 다녀왔다.

1930년에는 혼란에 빠진 국문법의 확립과 맞춤법의 통일의 위해 권덕규(權悳奎)·최현배(崔鉉培)·김윤경(金允經) 등과 함께 한글맞춤법 통일안 작성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에는 종래의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개칭했으며, 조선어학회에서 베푼 하기(夏期) 한글강습회 일로 전국을 순회하였다. 이 해부터 4년간 매년 여름 하기한글강습회에 전국 순회강연을 했다. 이 해 5월에 『한글철자법 일람표』를 간행했으며, 『성웅 이순신』을 찬술했다. 『성웅 이순신』은 출간되자마자 일제에 의하여 발매금지되었다.

1932년에 조선어학회의 기관지로서 『한글』을 간행하고 그 편집 겸 발행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해에 「터어키의 문자혁명」, 「변격 활용의 예」, 「한글운동의 회고」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1933년 10월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완성하여 발표하고 그 보급운동에 힘썼다. 이해에 「한글 철자법」, 「한글은 어떤 것인가?」, 「모어(母語)운동의 개관」, 「한글 맞춤법 해설」(조선일보 31회 연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1934년에는 국학과 사학자 동지들과 함께 역사 연구단체인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하는 데 참가하고, 11월에 기관지 『진단학보(震檀學報)』를 발간하는 일에도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5년 1월에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朝鮮語標準語査定委員會)를 개최하여 그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36년에는 그동안 주관해서 정리해 오던 조선어 표준말 사정을 완성하여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어학회 전담으로 사전편찬의 신규 사업을 시작하여 상임편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6월에 수양동우회 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일경에 붙잡혀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고 상고하여 1941년 11월 17일 고등법원에서 무죄 방면되었다.

그는 또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의 경과 기략」, 「훈민정음의 창정(創定)」, 「세종대왕과 문화사업」, 「조선어 사전편찬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운동으로 최현배·김윤경 등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경에 붙잡혀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3년 12월 8일 일경의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감방에서 옥사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외솔 최현배, 우리글과 말 수호 위해 헌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

최현배(崔鉉培, 1894.10.19 ~ 1970. 3. 23)선생은 1894년 10월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 동리(현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613번지에서 최병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1910년 관립한성고등학교(경술국치 후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변경)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에 보성학교 국어강습소에서 주시경의 강의를 들으면서 애국사상을 정립하였다. 1915년 관립한성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廣島)고등사범학교 연구과를 거쳐 교토(京都)대학 철학과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일본 유학 중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민족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한 선생은 귀국 후 1920년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부임하여 우리말을 가르치고 연구하였고, 우리글의 문법체계를 바로 잡을 목적으로 『우리말본』의 초고를 집필하였다.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 동아일보에 「조선민족 갱생의 도」를 66회 연재하여 우리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실천적 이상주의를 고취하여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선생은 또한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참여하여 기관지 『한글』 창간 및 한글날 제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의 준비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33년까지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집필해 온 『우리말본』을 1937년 출판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배 하에서 우리글과 우리말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전념하였다.

1938년 선생은 일제가 조작한흥업구락부사건으로 일경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에서 강제로 해직되었다. 선생은 해직 이후에도 한글을 역사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연구한 『한글갈』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942년 출판하는 등 연구와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뒤 한국인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을 더욱 강화하면서 같은 해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하였다. 선생은 10월 1일 함남 홍원경찰서에 또 다시 검거되어 1943년 9월 함흥감옥에 이감되어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심한 고초를 겪으며 옥고를 치러야했다.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게 된 선생은 광복 후 미군정청 편수국장, 문교부 편수국장 등을 역임하였고 연세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다 1970년 작고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시조시인 이은상,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 

이은상(李殷相, 1903. 10. 12. ~1982) 선생은 경남 마산에 태어나 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와 일본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사학부(史學部)를 수료하였다.

1922년 시조 ‘아버님을 여의고’와 ‘꿈을 깬 뒤’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28년 시조 ‘옛동산에 올라’ 등을 발표할 즈음부터는 계명구락부 조선어사전 편찬위원(啓明俱樂部朝鮮語辭典編纂委員), 1929년엔 월간지 『신생(新生)』 편집장, 이화여전(梨花女專) 문과 교수(文科敎授)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이 강했던 이은상 선생은 1930년대에 들어 일제에 뚜렷히 항거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이은상 선생은 이를 시조를 통해서도 드러내고, 일반 산문, 역사 저술에서도 이를 반영하였다. 특히 직접 국토 순례를 하고 기행문을 통해 이를 널리 전파했다. 이은상 선생은 국토 순례를 한 후 ‘향산유기(香山遊記)’를 써서 1931년 6월부터 『동아일보』에 35회 연재하였다.

1932년 4월엔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을 내었고, 같은 해에 『신가정(新家庭)』을 창간 편집했다.

1935년엔 『조선일보』 편집국 고문 겸 주간(主幹)이 되었다. 1938년에는 소위 중일(中日) 전쟁이 터졌다. 경술국치 이후 신문지면 위에 ‘일본군’이라고 써 왔는데, 일제는 ‘아군(我軍)’이니 ‘황군(皇軍)’으로 표기하도록 강제했다. 이은상 선생은 이에 반대하여 사내(社內) 투쟁을 하다가 분개한 마음으로 신문사 주간 자리를 박차고 나와 그 울분으로 전국 순례의 길에 올랐다.

1942년 『노산문선(鷺山文選)』을 내고, 그해 10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홍원(洪原) 경찰서 및 함흥(咸興)감옥에 구금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이듬해 9월에 석방되었다. 이은상 선생은 옥중(獄中)에서도 우리의 얼·말·글이라는 3대 정신을 그대로 여며 안은 시조를 썼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이은상 선생은 ‘ㄹ자(宇)’라는 시조를 지었다.

평생을 배우고도 미처 다 못 배워
인제사 여기 와서
ㄹ(리을) 자를 배웁니다.
ㄹ(리을)자 받침 든 세 글자
자꾸 읽어 봅니다.
제 ‘말’ 지키려다
제 ‘글’ 지키려다
제 ‘얼’ 붙안고 차마 놓지 못하다가
끌려와
ㄹ(리을)자 같이 꼬부리고 앉았오.

이은상 선생은 한글의 ‘ㄹ’자 받침 하나에도 이처럼 깊은 의미와 상징을 불어 넣고는 또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훗날 이은상 선생은 유명한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라는 말을 남겼다.

이은상 선생은 1945년 1월 사상예비금속(思想豫備禁束)으로 전남 광양(光陽) 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그해 8월 조국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광복 후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