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학원 9월 25일 오후 1시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개천문화축제 학술대회’을 서울국학원에서 개최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서울국학원 9월 25일 오후 1시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개천문화축제 학술대회’을 서울국학원에서 개최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서울국학원 9월 25일 오후 1시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개천문화축제 학술대회’을 서울국학원에서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2020년 서울특별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사업으로 서울국학원이 주최하고, 서울국학원과 국학연구원이 주관했으며, 서울시가 후원했다.

이날 김창환 서울국학원장은 개회사를 통해 “개천절은 대한민국의 유규한 역사화 빛나는 철학을 담고 있는 소중한 국경일이다. 우리를 자랑스럽게 하고 남북한이 공동으로 지낼 수 있는 국경일이기도 하다. 개천절이 담고 있는 천지인사상과 홍익철학에는 평화통일을 이루고 혼란한 세계를 조화로운 평화에 길로 이끌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이어 “서울국학원은 이러한 개천절의 바른 의미를 알리고자 서울시민과 함께 매년 개천문화축제를 개최한다. 개천문화축제는 거리퍼레이드, 단군 떡 나눠주기, 보신각타종식, 개천절의 의미를 담은 홍보물을 나눠 주는 행사이다.”며 “올해는 아쉽게도 코로나19감염증 상황으로 진행되지 않지만, 뜻깊은 학술대회를 통해 개천절이 더욱 바르게 정립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울시의회 추승우 의원은 축사를 통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개천문화축제 학술대회’를 열게 되어 다행이라는 마음과 더불어 5대 국경일 중 하나인 개천절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던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개천절 행사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 이를 통해 우리의 시조인 단군을 재조명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더 나아가 한 뿌리가 난 우리가 분단이 된 상황에서 단군정신이 민족통일의 사상적 기초가 되리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발표자 신운용 광복회학술연구원 교수. [사진=김경아 기자]
발표자 신운용 광복회학술연구원 교수. [사진=김경아 기자]

 

이어 추 의원은 “우리는 일제강점기에도 굴하지 않고 단군의 후손이라는 자존감을 잃지 않으면서 단군을 기리는 행사를 꿋꿋이 진행하였고 그 정신이 현재 대한민국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믿는다.”며 “우리 민족은 코로나도 이와 같은 기백으로 이겨내고 세계 속의 대한민국, 단군의 자랑스런 후손으로 자리매김을 하리라 기원해본다.”라고 덧붙였다.

권기선 대한국학기공협회 회장은 축사에서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국가이념이 ‘홍익인간 이화세계’이다. 사람들의 인성을 환하게 밝혀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세상을 밝고 건강하게 하자는 거룩한 뜻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며 “코로나로 4차 산업혁명으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개천을 통하여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이루고자 했던 단군할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을 오늘 학술대회를 통해 널리 펼쳐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학술대회 1부에서는 김광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의 사회로 먼저 신운용 광복회 학술연구원 교수가 “해방공간(1945-1947년)의 개천절 봉축 행사와 그 의미”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신 교수는 먼저 “국권회복 후 최초로 열린 1945년의 개천절은 대종교총본사와 임시정부의 환국이 늦어진 관계로 주로 국내 단군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를 먼저 담당한 세력은 대종교인 안재홍의 국민당이었다. 국민당은 1945년 10월 3일에 개천절 행사를 개최하고 단기 사용과 개천절 홍보를 결의하였다.”며 “이는 개천절이 국경일로 정해지는 문을 열어준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개천절의 의미는 사상적으로 분열을 통합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1946년의 개천절 행사의 특징은 전년과 달리 기독교 등 종교단체와 사회단체와 구성된 ‘교화사업중앙협회’가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1946년의 개천절은 대종교만의 행사가 아니라 이제 전 민족적 행사로 자리잡은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며 “특히 이시영 등의 임시정부 세력이 개천절 행사의 주역이었다는 점은 주시되어야 할 대목이다.”라고 강조했다.

발표자 조남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사진=김경아 기자]
발표자 조남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사진=김경아 기자]

 

1947년 개천절 행사와 관련하여 신 교수는 “1947년 개천절의 특징은 관이 주도하였다는 점이다”며 “군정청 문교부는 적극적으로 개천절 행사에 각 학교, 관공서, 사회단체 등 직능별로 거의 ‘의무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이는 개천절이 완전히 한국사회에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신 교수는 “대일항쟁기의 개천절이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제로 작동되어 민족의 단결과 대일투쟁 의지를 고무했듯이, 해방공간의 개천절은 민족국가 건립과 남북통일의 사상적 바탕이 작동되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일제시기 해외에서의 개천절 행사”를 발표한 조남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1919년 11월 27일 상해의 개천절 행사에 독립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1911년부터 어천절과 개천절 기념식을 하고자 했던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이 해에 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설립된 것은 단군의 보살핌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1921년 11월 11일에는 노백린 축사, 안창호 송축사, 김원식의 신가독창, 김두봉의 개천절 역사 봉술, 노백린의 만세삼창으로 진행되었고 1922년 12월 2일에는 상해 프랑스 조계 삼일당에서 800여명이 참가해 개천절행사를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1924년 11월 18일에는 남경 동포학우에서 개천절 행사를 했고, 1936년 10월 3일에 개천절기념식을 하고, 1943년 10월 31일에는 중경 중앙문화운동회당에서 개최하였다고 덧붙였다.

만주에서의 개천절 행사에 관해 조 교수는 “1913년 11월 10일 훈춘부근의 조선인은 음력 10월 1일부터 3일간 함께 휴업하고 학교도 휴과하였다. 1918년 11월6일에는 통화현 배달학교에서 개천절 행사를 했다”고 소개했다.

조 교수는 이어 미국과 러시아의 개천절 행사를 소개하고 “중국에서는 상해, 남경, 중경 등 임시정부가 옮겨간 곳에서 거행되었고, 만주에서는 독립군 기지가 있는 서간도와 북간도 등에서 치루어졌다. 미국에서는 뉴욕, 센프란시스코 등에서, 러시아에서는 연해주지역에서 열렸다”며 “한민족 동포가 있는 곳이라면 개천절 행사가 이루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행사를 통해 민족적 동질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발표자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사진=김경아 기자]
발표자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사진=김경아 기자]

 

또한 조 교수는 “이 행사는 단순한 기념식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을 표현한 점에서 독립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민족이 고난에 있을 때 호국의 정신이 나타난 것이다.”라고 밝혔다.

“‘만들어진 전통’ 개천절”을 발표한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개천절인 “10월3일이 이 날짜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 하는 것은 불확실하다. 단군의 건국을 전하는 최고의 문헌들인 《삼국유사》 《제왕운기》는 물론이고 단군의 건국을 언급하는 조선조의 사서들에서도 10월3일이라는 날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왕조 이래의 (또는 그 이전부터의) 단군관련 제례나 민간신앙 속에 그 같은 전승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한말에 개천절에 처음 제안될 때도 그 날짜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정확한 건국날짜에 대한 시비는 더 진행되고 않고 일단 제안된 10월3일이 큰 반대 없이 수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1949년에 정식으로 국경일이 될 때는 양· 음력을 따질 것 없이 민족적 기념일로의 의의와 10월 3일이라는 날짜전승이 중요하다는 논리하에, 음력 10월3일을 양력 10월 3일로 바꾸는 결단으로 나아갔다.”라고 밝혔다.

개천절 명칭의 유래에 관해 정 교수는 “단군의 건국을 기념해야 한다는 논의가 언론지상에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09년경부터이다. 그런데 기념일의 명칭이 개천절 외에 개극절(開極節), 단군절, 건국기원절, 개국절, 단군정조제일 등의 용어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라면서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개천절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게 된다. 그리고 해방후가 되면 개천절 이외의 다른 이름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음을 본다.”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개천절이 건국기원절이나 기원절 또는 개극절보다도 더욱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된 데는 개천이라는 말이 더욱 의미심장하고 함축한 바가 크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며 “단군의 탄강과 건국이라는 사건만이 아니라, 민족사의 출발과 고유문화전통의 시작이라는 사건을 모두 포괄하고, 거기에 이른 모든 일들이 하늘의 뜻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까리를 모두 상징적-은유적으로 표현해줄 수 있는 말로 ‘개천’이라는 용어가 선택되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표자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사진=김경아 기자]
발표자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사진=김경아 기자]

 

아울러 정 교수는 개천절이 국경일로 정착한 배경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1)민족적 동질성과 공동운명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했다는 점, (2)단군건국의역사를 전하는 문헌기록이 전승되어왔고 단군으로부터 동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사실로 믿어져왔다는 점, (3)단군을 민족사의 기점으로 상정하고 단군의 자손이라는 정체성 밑에 민족적 결속을 도모하려는 단국민족주의 흐름이 한국사 속에 있었고, 그가 한말에 와서 대중화하였다는 점, (4)‘전통의 창조’를 통하여 민족국가를 먼저 완성한 열강의 사례와 특히 일본의 ‘기원절’ 류의 사례가 영향을 주었다는 점, (5)한말-일제기 및 행방 후 시기를 통하여 민족 안팎에서 제기된 위기는 민족을 강화할 수 있는 기제를 요구하였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정 교수는 근대사를 통하여 개천절 민족주의를 배척한 세력으로는 (1)사대모화-소중화사상과 중국중심 천하사상, (2)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사학, (3)실증주의와 과학만능주의, (4)기독교 근본주의 (5)막시즘 (6)냉전과 권위주의 (7)서구숭배사상, 미국숭배사상, (8)반공동체적 가치관들 (9)탈가치의 실용주의와 경제우선론, (10)탈민족주의적 세계시민론과 낭만적 다문화주의, (11)포스트모더니즘 민족이론 등이 지적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 교수는 “개천절은 민족 전체의 자유와 통일 및 복지를 추구하는 취지하에 출발하였다. 거기에 동포애에 토대하여 공동체로 결속하고 개별적 욕구와 이해관계를 넘어 공적 비전을 만들어가고자 염원한 일반의 여망들이 결합된 것이다.”며 “홍익인간은 개천절의 지향점을 대변해주고 있다. 개천절은 분명히 민족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개천절의 민족주의는, 민족주의를 배제와 억압의 기제로 간주하고 침략과 전체주의 독재와 결부시키는 포스터모더니즘이 말하는 민족주의와는 다른 것이었다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국학원이 25일 개최한 서울시민과 함께한 개천문화축제 학술대회에서 발표자와 토론자가 참가하여 종합토론을 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서울국학원이 25일 개최한 서울시민과 함께한 개천문화축제 학술대회에서 발표자와 토론자가 참가하여 종합토론을 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동아시아 개천(開天) 문화의 유래와 변천 과정-《통화만발발자유지고고발굴보고》를 중심으로”를 발표한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통화만발발자유지고고발굴보고》를 바탕으로 그 간의 연구를 대폭 보완하여 1~5기로 정리했다.

1기-조단(B.C. 4000~B.C.3500년)의 시기, 선도사상의 요체인 삼원(천·지·인, 원·방·각)의 상징성을 요령 있게 담아낸 거대 규모의 적석단층, ‘3층원단(모자합장묘)ㆍ방대’가 조성되었다. 그 주인은 배달국 초 환웅족이 가져온 선진적 선도제천문화를 수용하여 토템족 웅족사회를 천손족 맥족(환웅족+웅족)사회로 바꾸어놓은 역량 있는 선인 지도자 웅녀군이었다.

1기(B.C. 4000~B.C. 3000년 배달국 전·중기) 제천단의 거대 규모와 대비되는 간결하고 담백한 제천의 흔적은 선도제천문화의 태동기, 군더더기 없이 기본에 충실한 선도제천문화의 출발점을 보여주었다.

2기(B.C.13세기~B.C. 8세기, 단군조선 후기) 만발발자의 드넓은 소도제천지에는 3층원단·방대의 국부에 주·부 제천사 2좌가 들어서 있을 뿐이었다. 1기에 자리잡힌 소도제천문화의 기본 틀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3기(B.C.8세기~B.C.3세기, 단군조선 말기). 소도제천문화가 크게 형식화되고 번잡해졌으며,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위계성까지 생겨났다. 단군조선 말기 맥족사회의 분열·와해 국면에서 선도제천문화도 세속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4기(B.C. 3세기~3세기, 고구려 개창기)가 되자 종래 번속화 방향으로 흘렀던 소도제천문화는 재차 간결화라면서 새로운 안정 국면을 맞았다. 고구려의 개창으로 맥족사회가 안정을 찾아가는 시대분위기와 맞물린 변화였다.

5기(3세기~5세기, 고구려 중기)에는 제천시설의 중첩 및 소규모화 현상, 또는 제천 공간의 축소 현상이 두드러졌다. 고구려 중기 선도제천문화의 위상이 서서히 악화되어가는 추세를 보여주었다.

정경희 교수는 “만발발자 유적을 위한 장백산지구 고제단군에 대한 중국 층의 관심과 연구는 1985년 만발발자 유적 정밀 조사, 1987년 만발발자 유적 1차 발굴, 1989년 여명 유적 발굴, 1995년 장백산지구 고제단군에 대한 공식 발표, 1887~1999년 만발발자 유적 2차 발굴 등을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그 정점에서 만발발자 유적 2차 발굴이 자리한다. 무려 3년에 걸친 요동지역에서는 유례가 없는 수준으로 주도면밀하게 진행된 만발발자 유적 2차 발굴은 ‘요하문명론-장백산문화론’의 마지막 정점을 찍기 위한 총력사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3년에 걸친 발굴 결과는 ‘요하문명론-장백산문화론’의 오류를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섰다.”라고 말했다.

즉 요서지역에서 시작된 연구는 요동 장백산지구 고제단군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결론을 보게 되었던 것인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요동 장백산지구에서 요서지역으로, 또 요서지역에서 다시 중원지역으로 흐르는 문명의 흐름을 중국 측이 인지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정 교수는 “이러한 사실을 수용할 수 없었던 중국 측은 결국 장백산지구 고제단군 연구를 중지하게 된다. 만발발자유적에 대한 국가문물국의 약(略)보고서에는 제천시설 부분이 선별적으로 은폐되었다. 약보고가 나온 후 다시 20여년이 흘러 2019년 역시 제천시설 부분이 선별적으로 은폐된 정식보고서가 간행되었다.”며 “이 정식보고서는 간행과 동시에 전 세계에 유포되는 이채로운 광경이 연출되었는데, 이는 1995년 중국 측이 널리 공포한 장백산직구 고제단군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무화하는 마무리작업임에 분명하였다. 《통화만발발자유지고고발굴보고》는 중국의 동북공정 ‘요하문명론-장백산문화론’의 마침표 작업으로 정리될 수 있다.”라고 밝혔다.

따라서 정 교수는 “이러한 사정을 충분히 인지한 다음 보고서는 검토하게 되면 많은 새로운 정보를 만나게 되지만,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보고서가 안내하는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만발발자 유적은 중국측이 강조해 마지않는 ‘선고구려’ 유적으로 비추어지기 십상이다. ‘고구려 문화에 준하여 그와 유사한 모습을 찾는’ 방식, 곧 시간을 거꾸로 거스르는 연구로 방향지워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경계했다.

이날 학술대회의 주제 발표 후에는 발표자 전원과, 토론자로 장우순 광복회 학술연구원 연구위원, 이경룡 하곡연구원 원장, 이인철 경복대학교 기획처장, 석상순 동북아고대역사학회 선임연구원이 참가하여 종합토론을 했다.

서울국학원은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하여 마스크 착용, 발열체크, 손소독, 사회적 거리두기 등을 하고 학술대회를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