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누구인가? 우리 이외의 지구인들이 우리에게 던질 물음이다. 우리들은 누구이지? 스스로에게 반드시 던질 수밖에 없고, 또 늘 던져야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들은 누구인가를 넘어 어떻게(how)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면서 우리 곁을 맴돌 수밖에 없다. 因(인)이 맺어진 이상 緣(연)이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때 그 ‘우리’에 해당하는 것은 실로 다양하다. 동굴 안의 가족이나 무리일 수 있고, 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씨족이나 부족일 수 있고, 정치인과 군대를 보유하며 때로는 이웃과 전쟁을 불사하는 국가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말씨와 생긴 것도 같고, 생활방식과 믿는 종교까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룩한 집단일 수도 있다. 보통은 이 단계에 이른 것을 민족이라고 부르거나,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앞으로 더 시간과 활동공간이 확대되고, 인식이 확장된다면 동아시아 범아시아를 넘어 지구 전체로 넓혀지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범주 또한 확장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발전의 과정에서 ‘우리’의 정체를 고민하고, 그 존재를 재확인하는 일은 시지프스의 바윗덩이처럼 영원한 윤회의 사슬이다. 그러나 때때로 사슬은 끊어지기도 하고, 그로 인한 무시무시한 결과는 역사에서 수없이 발생했고, 우리 또한 여러 번 경험했다.

21세기 세계에서도 소위 ‘민족’이라는 단위들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존재에 대해서 우려하는 부류도 있다. 과거에는 자본주의가 더 넓은 시장과 편리한 물류망을 확보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 또는 관리할 목적으로 민족국가의 탄생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른 지역을 점령하고 약탈하는 도구로서 민족주의와 종교를 차용했었다. 따라서 그 민족주의는 공격적인 국가주의, 폐쇄적인 전체주의, 종교의 힘까지 빌어 조작한 우월감에 가득 찬 인종주의,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등과 음으로 양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서구인들은 세계를 단일시장(WTO. FTA)과 단일금융체제(IMF)로 만들고, 하나 내지는 몇몇 지역을 중심으로 재편(regionalization,지역화)하면서, 문화와 인식 또한 그러한 목적에 걸맞게 변형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시효를 잃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고 판단한 민족주의를 버리고 지구화(globalization)를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더욱 확장된 활동단위가 필요하고, 인류를 하나의 공존공영단위로 인식하면서 발전을 모색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당연히 보편적인 인류애를 강조하고, 더 개방적인 자세로 관계를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민족주의를 무참하게 버리고 그들의 세계화(그 상대적인 단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지만)를 추진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서구인들의 정신적인 후원을 받아가면서 민족 또는 민족주의를 마치 ‘악의 축’‘ 부도덕한 논리’처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민족주의라는 게 별거인가?

비록 오염된 단어지만 대체단어를 못 만들었다면, 책임감을 느껴서라도 내용을 수정해서 사용해야 하는 게 아닌가. 사실 민족주의의 개념과 내용은 꾸준히 변화해왔다.

좀 더 가깝고,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희로애락을 함께한 사람들을 민족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 자기를 더 잘 알고자, 자기역할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며, 남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더불어 살고자 하며,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생각과 행위(또는 논리 사상 전략이라도 상관없지만)를 민족주의라고 표현하면 안 되는 걸까? 그리고 그러한 내용이라면 민족주의를 오히려 더 살려내고 보듬고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서구인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빠질 수 있는 함정을 피하고, 민족주의가 내뿜을 수 있는 악취와 원초적인 죄악을 예방하고 치유해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1세기는 ‘顚覆(전복)과 反省(반성)’의 시대이다. 인류 전체가 혼란 속에 방황하며, 그 가운데에서도 우린 가장 심각한 상태에 속한다. 이럴 때일수록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더욱 절실해진다. 소외된 집단들의 민족주의가 역사의 낡은 잔재이며 악의 축인 것처럼 선동하였던 서구인들은 금융위기 같은 현상 앞에서 지구화를 어떻게 다시 꾸며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