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냇저고리의 끈이 이렇게 긴 건 막 태어난 아이가 오래 오래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에요. 긴 끈을 아기의 허리에 칭칭 둘러서 묶어주었죠.” 74세의 이영화 관장(비움박물관)이 직접 50여 년간 모은 소중한 보물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오래 오래 살기를 바라며 배냇저고리의 끈을 길게 한 어머니의 마음이 묻어난다. [사진=강나리 기자]
갓 태어난 아이가 오래 오래 살기를 바라며 배냇저고리의 끈을 길게 한 어머니의 마음이 묻어난다. [사진=강나리 기자]

폭우가 쏟아지던 광주광역시에서 지난 7일 지인의 소개로 독특한 콘셉트를 지닌 ‘비움박물관’을 찾았다. 이영화 관장은 “민속박물관에 가보면 예술작품처럼 잘 만들어서 왕실이나 귀족들이 썼을 것 같은 물건만 있잖아요. 일반 서민들이 일상에서 직접 쓰던 살림살이를 모으고 싶었어요.”라고 했다.

광주광역시 예술의 거리에 있는 비움박물관 이영화 관장. [사진=강나리 기자]
광주광역시 예술의 거리에 있는 비움박물관 이영화 관장. [사진=강나리 기자]

비움박물관에는 1970년대 이전 대일항쟁기와 구한말, 그리고 그 이전에 우리네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 부모님들이 썼던 물건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쓰던 걸 본 기억이 있는 코티분의 향기가 코끝에 느껴진다.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아버지가 선물한 만년필과 그 짝인 빠이롯트 잉크병이 놓여있어 그 병을 열 때마다 느꼈던 설렘에 다시 뭉클해진다.

옥상 장독대부터 5층에서 하나씩 내려올 때마다 뒤웅박, 사기그릇, 놋수저들, 사극에서 봤던 반닫이장과 개반닫이장, 쭈꾸미 단지, 떡쌀, 가마니를 짜던 틀, 할머니 방에 늘 있던 실패와 미싱까지 삶 속 어느 곳에선가 세월의 더께가 묻어있는 물건들이다. 연령대에 따라 ‘맞아. 그게 여기 있네?’라고 느낄 수도 있고. 생전 처음 보는 물건도 있는 곳이다.

비움박물관에는 옛 정취가 묻어나는 장독대, 초롱, 물레, 베개 등 살림살이들이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비움박물관에는 옛 정취가 묻어나는 장독대, 초롱, 물레, 베개 등 살림살이들이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특히 몇몇 유리장에 들어있는 물건을 제외하고 대부분 만져볼 수 있다는 게 굉장한 매력이다. 손끝에서 질감이 곧장 뇌로 전달되며 그 물건을 완전히 이해하게 한다. 보면 볼수록 투박한 가운데 뭔가 무늬를 새기거나 아름다움, 예쁨, 때론 못난이의 매력을 담은 기지에 함박웃음이 난다.

이영화 관장이 벼룩시장에서 사왔다는 촌노인 조각을 보니 뼈 속 진액까지 자식에게 다 내주고 늙어버린 어머니의 주름이 처연했다. 박물관 건물 가운데를 한옥의 중정처럼 비워 유리창에 들이치는 빗물을 보는 맛이 있다. 이 관장은 겨울에 눈이 쌓인 광경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게다가 전시관 어느 곳에나 관람자가 주저앉을 수 있는 툇마루와 투박한 의자가 놓여 옛날 어느 시대에 한참 푹 빠져 있어도 좋을 듯하다.

이영화 관장이 벼룩시장에서 샀다는 노인조각과 그의 자작시 '촌노인'. [사진=강나리 기자]
이영화 관장이 벼룩시장에서 샀다는 노인조각과 그의 자작시 '촌노인'. [사진=강나리 기자]

1970년대 당시 20대 새댁이던 이영화 씨는 광주의 고유한 풍습에 따라 1년 여 동안 여러 이웃들의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 집 장맛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시집와서 낯설어하는 새댁에게 고향처럼 익숙해지라는 배려겠죠? 그런데 그때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쓰던 물건들을 다 버리는 거였어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그때의 일이다. 마치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고, 6.25 동족상잔을 겪으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그룹에 속한 것이 다 옛 풍속 때문이라는 듯 놋그릇, 백자종지, 다듬이 돌 등 많은 생활용품을 버렸다. 그리고 서양에서 들어온 플라스틱과 스테인레스에 빠졌다. 서양식 사고방식과 서양식 생활방식으로 살아야만 근대화가 된 것이라고 여겼다.

전시관 곳곳에 놓인 그리운 물건들. 어릴 적 어머니가 화장할 때 쓰던 분도 놓여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전시관 곳곳에 놓인 그리운 물건들. 어릴 적 어머니가 화장할 때 쓰던 분도 놓여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이영화 씨는 시댁에서 당시에는 흔치 않던 시고조부의 사진조차 쓸데없는 물건이라고 버리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버리면 안 될 것 같아 하나 둘씩 모았죠. 오일장과 지금의 벼룩시장 같은 게 열리면 무조건 나가서 사서 모으다 보니 어느새 곳간이 하나 가득 차더군요. 그래도 그걸 멈출 수가 없었어요.”

주변에서 젊은 사람이 구질구질한 옛날 물건들을 왜 모으느냐는 비난을 받았다. 그런 그를 이해하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아들은 국내 명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유학 중 그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가 민속품들을 모으는 건 중요한 일이다. 지금은 쓸데없다고 하지만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할 때는 그런 게 아주 중요하다. 우리의 역사적 정체성을 찾는 때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 아들이 한번은 영국 런던박물관에서 ‘윤두서의 초상화’가 전시된 걸 보았다. 당장 어머니께 전화해 초상화가 한국에 돌아가면 ‘녹우당’에 연락해서 영인본을 받아놓으라고 했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모르고 아들이 시키는 대로 연락했죠. 윤두서 후손인 녹우당 주인께서 젊은이가 외국에서 초상화를 보고 그런 부탁을 했다는 것에 기꺼이 영인본을 보내주더군요. 언젠가 녹우당 쪽에 갈 일이 있으면 들러 사례를 하고 싶다고 하곤 30여 년이 훌쩍 지났어요.

얼마 전 녹우당 마님이 녹우당 보수를 하는데 참고한다고 여기 박물관에 들러서 깜짝 놀라시더군요. 대학교수인 사위가 영인본을 해달라고 몇 년째 사정해도 끄떡도 안 했는데 어떻게 여기에 영인본이 있느냐고 하시더군요. 정말 귀한 걸 받았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죠. 너무나 감사해서 부족하지만 작은 선물을 했습니다.”

비움박물관 1층 자료실. 마치 옛 서재와 같은 곳 한켠에 윤두서 초상화 영인본이 무심히 놓여있다. (오른쪽 하단) [사진=강나리 기자]
비움박물관 1층 자료실. 마치 옛 서재와 같은 곳 한켠에 윤두서 초상화 영인본이 무심히 놓여있다. (오른쪽 하단) [사진=강나리 기자]

이영화 관장이 칠순 때 그의 응원자인 아들은 모아놓은 물건을 종류대로 분류해 보시라고 권했다. 그러더니 5층짜리 건물에 박물관을 지어보라며 선물했다. 이 관장은 10명의 목수와 함께 직접 하나하나 만들었다. 이불보를 그림처럼 활용하고 베갯모들을 기와와 단청처럼 꾸미고 수많은 떡쌀과 밥공기 등을 한곳에 늘어놓기도 했다. 전시물뿐 아니라 전시한 방식에서도 멋이 묻어난다.

그리고 오랫동안 써왔던 자작시로 곳곳에 감상을 적었다.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시에서 말의 맛이 느껴진다. 음률이 좋아 젊은이들이 랩으로 만들어도 좋겠다고 느꼈다. 그중 한 편 ‘아버지’에서는 이영화 관장에게 넓은 등을 내어주던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전시관 곳곳에는 이영화 관장이 자신의 생각을 담은 자작시를 두었다. 비움박물관 입구의 시와 아버지에 대한 시 등이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전시관 곳곳에는 이영화 관장이 자신의 생각을 담은 자작시를 두었다. 비움박물관 입구의 시와 아버지에 대한 시 등이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이영화 관장은 전시관 2층 툇마루에 앉아 자신이 그동안 품어온 생각을 이야기했다.

“지금 지구적 재앙 앞에 서고 보니 우리가 미래를 기약하려면 가난하게 사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깨진 바가지 하나도 꿰매 쓰고, 그래도 쓰기가 어려워지면 또 다른 용도로 활용해 쓰며 아끼고 버리질 않았어요. 나뭇가지도 삐뚤고 휘어진 있는 모양 그대로 슬기롭게 활용했죠. 요즘은 물건이 흔해서 너무나 쉽게 사고 쉽게 버리잖아요. 그렇게 해서 우리를 품어주는 지구가 살아남겠어요?

가난의 흔적처럼 초라하고 청승맞다고 버렸던 옛 선조들의 지혜를 이제 우리가 다시 배워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언젠가 우리나라를 이끄는 리더, 그리고 전 세계의 리더들이 용기 있게 ‘이제 우리 조금 가난하게 삽시다!’라고 과감하게 선언하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비움박물관 이곳 저곳을 설명해주는 이영화 관장. 전시장에 툇마루가 있어 언제든 앉아 쉬며 구경할 수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비움박물관 이곳 저곳을 설명해주는 이영화 관장. 전시장에 툇마루가 있어 언제든 앉아 쉬며 구경할 수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기자와 헤어지며 그는 “한반도에 태어나서 한국인들이 쓰던 ‘말씨와 솜씨, 마음씨’를 살려 잘 발아를 시켜서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게 한다면 정말로 지구도 살만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라고 소망을 밝혔다.

그는 비움은 비어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또한 아름다움은 알아가는 즐거움일 것만 같다고도 했다. 우리의 옛 정취와 추억을 담은 그곳이 금세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