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고대역사학회(학회장 정경희)는 6월 13일(토) 충남 천안 국학원에서 <동북아문명과 백두산>이라는 주제로 제3회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번 학술대회는 백두산이 한민족의 성산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역사 문화적 배경을 살핀 최초의 학술대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성산’이라는 오랜 인식에도 역사문화 전통과 관련한 인문학 접근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근래에 들어서는 화산폭발 등 지질학과 관련하여 주로 조명되었을 뿐이다.

백두산은 고구려의 근기 지역이자 발해시대에는 서경압록부가 자리한 곳이었지만 고구려 이전의 역사문화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백두산의 역사문화적 공백은 중국 동북공정의 일환인 ‘장백산문화론’의 대상이 되어 침탈을 불러왔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특히 고구려 이전 백두산 일대에서 펼쳐졌던 고대사, 백두산 일대의 고대사에 대한 근대 지식인들의 인식, 백두산과 관련한 고유의 백산신앙의 존재와 전파 형태 등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졌다.

▲백두산문명의 상징, ‘천년단목’을 그린 19세기 지도. [사진=동북아고대역사학회 제공]
▲백두산문명의 상징, ‘천년단목’을 그린 19세기 지도. [사진=동북아고대역사학회 제공]

중국 동북공정의 시작은 요하문명론이다. 요하문명론은 애초 중원·요서지역에 대한 이론으로 출발하였으나 점차 요동·한반도 지역으로도 확대되었고 이 과정에서 요하문명의 동진 이론으로서 장백산문화론이 등장하였다. 요하문명론과 장백산문화론 중에서도 특히 장백산문화론은 민족사의 상징이자 정신적 구심인 백두산에 대한 한민족의 오랜 기억과 전통을 부정하는 것으로 동북공정으로 인한 한국사·한국문화 말살의 현주소를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중국 장백산문화론에서는 백두산문화를 종족면에서 만주족계, 문화 내용면에서 중국계로 해석, 백두산문화와 한민족(예맥족)의 관련성을 철저하게 부정해왔다.

이러한 중국 장백산문화론의 극복을 위해 동북아고대역사학회에서는 지난 2019년 6월 첫 학술대회 <요동~요서 지역의 제천유적과 중국 백두산공정의 극복> 및 2019년 11월 제2회 학술대회 <홍산문화 적석총의 기원과 중국 ‘요하문명론-장백산문화론’의 극복>을 개최하였다. 2차에 걸친 학술대회를 통해 요동~요서지역의 상고·고대시기의 제천 유적(적석 제단 · 적석 무덤)의 주인공이 한민족이었음을 밝힘으로써 중국의 동북공정 ‘장백산문화론’의 허구성을 입증해내었다.

이를 이어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백두산 일대에서 펼쳐진 상고고대 역사문화의 주역이 한민족이었음을 근대 지식인들의 백두산 인식 문제, 백산신앙의 내용과 일본으로의 전파 문제, 백두산 일대에서 시작된 한민족사의 기원 문제 등을 통해 살펴보았다.

백두산=단군 발상지역 인식은 대일항쟁기 지식인뿐 아니라 일반인에까지 널리 퍼져

먼저 이명종 교수(강릉원주대학교)가 「1910~1920년대 식민지조선 지식인들의 ‘백두산=단군발상지’론과 ‘만주=단군강역’론」을 발표하였다. 이명종 교수는 “백두산을 단군의 발상지, 만주를 단군조선의 도읍지와 강역으로 보는 견해, 또 만주족을 단군의 후예로 보는 견해는 1910·20년대 조선지식인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표명되기 시작하였고 1930·40년대에 이르면 만주가 조선 역사의 발상지이고 요람이었다는 주장이 일반화되었다”고 말했다.

이명종 교수(강릉원주대학교)가 1910~1920년대 조선 지식인들의  ‘백두산=단군발상지’론과 ‘만주=단군강역’론에 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동북아고대역사학회]
이명종 교수(강릉원주대학교)가 1910~1920년대 조선 지식인들의 ‘백두산=단군발상지’론과 ‘만주=단군강역’론에 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동북아고대역사학회]

 

이 교수는 이어 “강역의 크기는 만주를 향한 영토적 욕망을 나타낸 것이라기보다는 조선민족이 유사 이래로 독립적인 영토 국가를 영위하며 존재했다는 점을 증빙하는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라며 “‘만주=단군강역’이라는 담론 속에는 조선 지식인들의 나라를 잃은 현실과 민족 독립을 향한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민족 소도제천의 본향인 백두산의 백산신앙, 일본열도로도 전해져

김철수 교수(중원대학교)는 「동북아의 백산신앙과 백두산」을 통해 “백산신앙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신앙으로 동북아 창세역사 문화의 본원지이며 한민족의 소도제천의 본향”이라며 “이곳을 중심으로 환웅과 단군의 제천의례가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김철수 교수(중원대학교) 동북아의 백산신앙과 백두산에 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동북아고대역사학회]
김철수 교수(중원대학교) 동북아의 백산신앙과 백두산에 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동북아고대역사학회]

그는 “이러한 백산신앙은 시간이 흘러 백두산의 소도를 본보기로 이곳저곳에 소도가 세워졌는데 특히 바다 건너 일본열도로 전해져 일본의 백산신앙의 원류가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에는 예로부터 산을 신성시한 산악신앙, 즉 백산신앙이 있었으며, 현재 일본전역을 통틀어 2700여곳에 달하는 백산이 있다. 이러한 백산에는 백산신사(시라야마히메 신사)가 세워져 백산신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 교수는 “이 신사의 주신은 고구려 신으로 알려진 구쿠리히메신이며 환웅의 숭배 흔적도 남아있다”며 “백산은 단순히 산의 정상부가 하얀 산이 아니라 백두산처럼 외경의 대상이었고 신성한 산으로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며, 쓰시마의 솟도신앙, 일본 신도의 히모로기 등은 백산신앙이 일본열도로 흘러들어간 증거로 볼 수 있다”고 하여 고대 한국의 사상과 문화가 일본열도로 흘러갔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백두산 서편 일대의 신석기 제천유적과 선도문헌의 교차 연구를 통해 배달국의 개창과 한민족의 형성 과정을 재구성

마지막으로 정경희 교수(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는 「백두산문명과 한민족의 형성」을 통해, “한민족 기원에 대한 연구는 일제시기 일본인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한민족 시베리아 기원설’로 정리될 수 있는데, 광복 이후에도 답습이 되어 한국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발표했다.

정경의 교수(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가 백두산문명과 한민족의 형성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동북아고대역사학회]
정경의 교수(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가 백두산문명과 한민족의 형성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동북아고대역사학회]

한민족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1980년대 이후 중국 동북지역에서 신석기·청동기 고고학 성과가 쏟아져 나오면서 비로소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고고학 성과를 바탕으로 한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국 민족학 연구의 위기를 불러오기도 하였지만 한국학계 일각에서 단군신화에 기반한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개발하는 등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정 교수는 “특히 1990년대 중국측에 의해 조사·발굴된 백두산 서편 일대의 고제단군과 한국측 선도문헌의 내용들이 합치되고 있기에 이를 통해 서기전 4000년 무렵 백두산 서편지역에서 시작된 배달국 개창과 한민족(예맥족) 형성 과정을 정리해보게 된다”며 “이러한 시도는 고고학과 선도문헌을 접목하여 한민족의 형성 과정을 새롭게 해석한 시도로서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모든 주제발표가 끝난 후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동북아고대역사학회가 6월 13일(토) 충남 천안 국학원에서 '동북아문명과 백두산'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주제 발표가 끝난 후 질의 응답을 하고 있다. [사진=동북아고대역사학회]
동북아고대역사학회가 6월 13일(토) 충남 천안 국학원에서 '동북아문명과 백두산'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주제 발표가 끝난 후 질의 응답을 하고 있다. [사진=동북아고대역사학회]

 

동북아고대역사학회 관계자는 “올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감염병으로 인해 기존 문명의 질서가 뒤흔들리고 있는 격변기를 맞아 한국인들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과 인식 정도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 고유문화의 상징인 백두산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높아질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다”며 “한민족의 백두산문명이 동북아 고대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으로 인하여 현장에 제한된 소수의 인원만 참석하여 진행되었다. 이에 학회 측은 현장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학술대회 전체내용을 7월 초, 동북아고대역사학회 유투브 채널을 통하여 제공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