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전라남도 담양 식영정을 찾았다. 많이 알려진 소쇄원 인근에 있는 정자로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유적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식영정을 오르는 계단부터 남다르고 구비 돌아 계단을 오를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보이는 멋이 있다. 한옥과 절에서는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안에서 밖을 내다봤을 때 비로소 왜 이런 곳에 이렇게 지었는지 알 수 있다고 들었다. 식영정에서 또다시 한옥의 진정한 멋은 유홍준 교수가 이야기한 ‘차경借景)’임을 실감했다.
정자가 높은 곳에 위치해 댓돌이 있는 마루에 앉아보니 키 큰 소나무가 있어도 시선을 가리지 않았다. 새들이 ‘소나무에서 식영정 지붕 위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멋지구나’라고 여겼다. 더 멀리 보이는 것은 허허벌판이어서 그 정도가 이 식영정이 가진 매력의 전부인줄 알았다.
그러다 문득 정면이 아닌 옆을 보니 특이하게도 왼쪽을 벽처럼 막아 족자와 같은 세로로 긴 창을 내었다. 정자는 대부분 시원하게 뚫려있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궁금증이 일어 마루에 올라섰다.
그리고 창을 한 폭의 족자로 해서 펼쳐진 광경에 놀랐다. 광주호가 펼쳐졌다. 나무와 S자로 휘어진 물줄기, 그 끝에 넓은 호수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서프라이즈!’이다.
호수가 아름다운데 왜 일부러 벽으로 막아 족자 창으로 볼 수 있게 했을까?
그 순간 아름다움을 욕심껏 다 펼쳐내지 않는 마음, 깊은 사색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펼쳐놓지 않고 창을 한 폭 산수화의 족자로 활용하면서도 그 족자 앞에서 물밀 듯 밀려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한 묘수.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는 기쁨. 자연이 이토록 감동적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다.
식영정을 왼편에 두고 둘러 오르니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비가 있다. 한자를 주로 쓰던 사대부가 우리글 훈민정음을 섞어 표현한 가사의 맛이 남다르다. 다시 식영정 오른쪽을 둘러 내려오면서 보이는 광주호의 모습도 또 달라보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각별한 뜻을 담았음을 알 수 있었다. 직접 보아야 알 수 있는 감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