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이야기하면서 석오(石吾) 이동녕(1869-1940)을 빼놓을 수는 없다. 엄격하게 따지고 볼 때 이동녕이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은 임시정부 요인 중의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서 최고 지도자로서 혁혁한 공적을 쌓은 것에 비해 그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평생에 명예와 지위를 탐내지도 않았던 그의 성품이기도 했지만, 임시정부 인물로 특정인만 내세우는 야멸찬 세태를 새삼 느끼게도 한다.”

국학원이 1월 14일 오후 5시30분 서울 시민청 태평홀에서 개최한 제196회 국민강좌에서 김병기 광복회 학술연구원 원장은 ‘임시정부의 거목(巨木), 석오 이동녕’이라는 제하의 강연 발표 자료에서 이렇게 밝혔다.

국학원은 1월 14일 오후 5시30분 서울 시민청 태평홀에서 제196회 국민강좌를 개최했다. 이날 김병기 광복회 학술연구원 원장이 ‘임시정부의 거목(巨木), 석오 이동녕’이라는 제하의 강연을 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국학원은 1월 14일 오후 5시30분 서울 시민청 태평홀에서 제196회 국민강좌를 개최했다. 이날 김병기 광복회 학술연구원 원장이 ‘임시정부의 거목(巨木), 석오 이동녕’이라는 제하의 강연을 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김 원장은 “이동녕 선생은 충남 목천 출신인데, 이 사실을 잘 모른다”며 이동녕 선생을 우리가 잘 모르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는 광복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제대로 하지 못해 친일파가 역사의 주류가 되었다. 둘째는 독립운동사를 정리하지 못했다. 김 원장은 독립운동사를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라고 말했다. 친일파들이 그들의 행적이 들어날까 봐 독립운동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고 김 원장은 덧붙였다. 이동녕 선생을 잘 모르는 또 하나의 이유로 김 원장은 ‘영웅주의’를 지적했다. 임시정부 인물로 특정인만 내세우거나 청산리대첩을 어느 한 사람이 다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그러한 예라며 김 원장은 그러나 그 속에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 투쟁을 하고 피를 흘렸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이동녕 선생의 행적을 연대순으로 설명하며 그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살폈다. 김 원장의 발표 자료와 강연 내용을 통해 석오 이동녕 선생을 조명한다.

가계와 구국운동

이동녕은 1869년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부친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통 명문가인 연안이씨 가문으로 부친이 경북 의성군수와 영해부사를 지낸 양반가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다. 남달리 총명한 기질을 갖고 세상에 태어났으니 사람들이 신동이라 불렀고, 10세에 이미 사서삼경에 입문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병마(兵馬)의 도읍지요, 유림으로 이름 높았던 목천 고을은 오랜 세월 경세(經世)와 예법의 고장으로도 알려졌던 곳이다.

1885년 17세에 서울 봉익동으로 이사하였으나, 곧 부친을 따라 영해로 갔다. 이곳에서 이동녕은 군수로 집무하던 부친을 도와 선정을 베풀어 ‘작은 군수’로까지 불렸다고 한다.

김병기 광복회 학술연구원 원장은 14일 국학원 제198회 국민강좌에서 이동녕 선생의 행적을 연대순으로 설명하며 그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소개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김병기 광복회 학술연구원 원장은 14일 국학원 제198회 국민강좌에서 이동녕 선생의 행적을 연대순으로 설명하며 그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소개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1892년 24세에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길로 나가기보다 시들어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개화와 민권을 위한 사회개혁운동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이듬해 원산으로 가서 부친을 도와 육영사업에 힘썼다. 이동녕은 엄격한 유교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생각과 행동은 매우 진보적이었으며 민주적인 데가 있었다. 일찍부터 관리였던 선친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찾는 동안 백성들의 불우한 처지에 누구보다 관심을 기울였다. 후일 그가 개화와 민권운동에 앞장서서 활발히 활동하게 된 것도 이 같은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간도 용정에 망명 서전서숙 설립

1894년 26세에 풍산 김씨 김경옥과 혼인을 하고 1896년 28세 때부터는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개화 민권운동에 앞장섰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30세에는 묵암 이종일이 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하면서 본격적인 민족사상을 정립하게 되었다. 34세에는 월남 이상재, 전덕기 목사 등과 YMCA 운동에 참가하고 전덕기, 양기탁, 신채호, 조성환, 김구, 이회영 등과 상동청년회를 중심으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동녕은 대한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매국노를 응징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다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06년 38세 때는 보재 이상설과 함께 북간도 용정에 망명하여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해외 독립운동기지 수립에 헌신하였다. 1907년 동지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자 일시 귀국하여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갑, 유동열, 안창호 등과 같이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이들과 함께 대성학교와 오산학교 설립에도 협조하였다. 이동녕은 총서기로 신민회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고 또한 국외 독립군 기지 개척론을 주창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동녕은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여 이상룡, 이회영 형제들과 함께 경학사를 설립하고 이어서 신흥강습소를 창건하여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동녕이 초대 소장을 맡았던 신흥강습소는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모체로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군들이 후일 청산리대첩 등 항일무장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19013년 이동녕은 블라디보스톡으로 피신한다. 국내의 맹보순으로부토 급한 밀보를 받은 것이다. 일제의 형사대가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장도순, 김형선 다섯 사람을 암살하거나 체포하기 위해 남만주로 출발할 예정이니 속히 피신하라는 통보였다.

김 원장은 “이들이 상이한 결과 이회영은 국내로, 이시영은 봉천으로 이동녕은 불라디보스톡으로 가기로 했다. 이동녕이 러시아 방면을 택한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상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기에 앞서 이동녕은 가족과 이별하였다. 기약 없는 이별이었으니 부인 김경선과도 결국 살아서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광복군정부' 수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난 이동녕은 극동총독 보스타빈의 양해에 따라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였는데 이는 최초의 민간임시정부이다. 그러나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당국은 자국 내의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이동녕은 러시아 관헌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듬해 풀려난 이동녕은 지방의 부호인 최봉준의 자금을 지원받아 〈해조신문〉을 발행하면서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18년 이동녕은 대종교인 백순과 함게 러시아를 떠나 동만주 영안으로 건너갔다. 이곳에는 대종교 총본사를 지키고 있는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이 있었다. 이동녕은 대종교에 입교하여 국조단군을 신봉하는 대종교를 포교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대종교야 말로 한민족의 뿌리이자 우리 민족사상의 근본으로 이를 통해 자주독립을 성취하는 힘이 되리라 굳게 믿었다.

김병기 원장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한 이동녕은 그리고 통합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이어 국무총리와 대통령 대리, 국무령, 주석 등을 역임하며 20여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김병기 원장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한 이동녕은 그리고 통합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이어 국무총리와 대통령 대리, 국무령, 주석 등을 역임하며 20여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제1차 세계대전에 종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즈음 1918년 무오년 김교헌을 두서로 하여 신규식, 조소앙, 이시영, 신채호, 안창호, 이동녕 등 39인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하였다.

김 원장은 “만주 길림에서 배포한 이 대한독립선언서야말로 우리 독립운동사에 특기할 쾌거였으며 이동녕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다수 참여, 육탄혈전을 선포한 독립선언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이동녕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북경에서 이회영, 이시영, 이광 등을 만나고 이들과 함게 상하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본격 참여하였다. 상하이에서는 이미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임시정부 수립을 제창한 바 있었다. 1918년 8월 하순 여운형, 장덕수ㅜ,선우혁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국내를 비롯하여 일본, 러시아 연해주, 미주 등 각지에 당원을 파견하였다. 또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독립을 호소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무오독립선언,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국내의 3.1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임시정부 수립 활동이 더욱 촉진되었다. 상하이에 모인 인사들을 중심으로 대표를 선정하여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4월 11일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김 원장은 “4월 10일과 11일에는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에서 29명의 의원이 출석하여 ‘임시의정원’이라는 명칭의 의회를 구성하고 이동녕을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또한 국호와 연호 및 관제를 결의하고 임시헌장 10개조와 헌장 선포문을 결정하면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임시정부의 수립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라는 대의(代議)기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흔히 간과되어왔다”며 “이는 근대 민주공화정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삼권분립을 망각한 채 임시의정원을 임시정부(행정부로서의 임시정부)와 동일시하거나 혹은 예하 기관정도로 인식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임시정부는 몇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하여 주먹구구식으로 수립한 것이 아니라 적법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 수립한 것이다. 즉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여 국회를 구성하고, 국회를 통해 국가의 명칭과 통치 체제 및 관제를 정하고, 헌법을 제정, 반포하는 등 근대 국가 수립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김 원장은 강조했다.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임시정부 수립 산파역을 다하다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한 이동녕은 그리고 통합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이어 국무총리와 대통령 대리, 국무령, 주석 등을 역임하며 20여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게 된다.

1921년 1월 국무총리 이동휘, 5월 노동국 총판 안창호가 잇달아 사임하자 이동녕은 국무총리 대리로서 임시정부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1924년 이동녕은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하고 군무총장도 겸임하였으며, 이승만의 장기 궐석에 따라 대통령의 직권을 대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임시정부의 최고 영도자로서 이동녕은 임시정부의 재건과 독립운동세력의 대동단결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1925년 국무령제 개헌 직후 이동녕은 잠시 내각 수반인 국무령을 맡기도 하였고, 1926년 12월 재차 김구가 국무령 선임을 지원하여 내각을 성립시켰다. 김구는 훗날 《백범일지》에 “금일의 오인(吾人)을 있게 한 이면에는 이동녕의 지원이 있어 가능하였다”고 언급했다. 1927년 59세 때 국무령제에서 국무위원회제로 개헌되어 이동녕은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창당,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이동녕과 김구는 1933년까지 국무위원회 주석과 국무원으로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지탱해나갔다. 국무위원제는 1940년 10월 주석 지도체제로 개정될 때까지 존속했다.

이처럼 이동녕은 임시정부의 중추역할을 했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의거도 김구가 이동녕과 상의하여 결행한 것이었다.

김 원장은 “이로 인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동녕,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은 상해를 떠나 절강성 가능, 항주, 진강, 장사, 광주, 유주, 기강으로 피신하였다”고 말했다.

김병기 원장은 "이동녕은 분열된 독립운동계의 단결을 주장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계의 원로이자 진정한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김병기 원장은 "이동녕은 분열된 독립운동계의 단결을 주장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계의 원로이자 진정한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피난 중에도 이동녕은 임시정부의 간판을 놓지 않았고, 1935년 세 번째로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주석이 된 후 이동녕은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기 위해 그해 11월 김기,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등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1937년 7월 7일 일제가 노구교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독립운동단체들은 체제를 정비하여 대일항전에 준비하였다. 이동녕은 한국국민당의 대표로 1937년 7월 한국독립당 홍진, 조선혁명당의 이청천 등과 남경에서 회의를 갖고 3당 합동의 기초가 되는 공동 결의안을 도출하였다. 그리하여 이동녕은 여러 단체를 묶어 임시정부를 옹호, 지원하는 외곽단체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이 출범하는 데 중추 역할을 했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강력한 항일전을 수행하기 위해 광복군 편성을 서둘렀다.

광복군 창설 위해 노심초사하다 순국

이동녕은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김구와 함께 광복군 창설을 위해 노심초사하다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어 급성폐렴 증세까지 있었다. 그로 인해 이동녕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 광복을 바로 앞두고 이국 땅 기강에서 1940년 3월 13일 7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김병기 원장은 “이동녕은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로 생애 후반기인 20여년 동안 임시정부를 세우고 위기 때마다 지켜냈다. 그는 1940년 타계할 때까지 올곧은 길을 가면서 한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을 도와 일을 성사시키고 남과 공을 다투지 않는 희생정신과 인품을 지닌 거인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원장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임시정부에 큰일이 일을 때마다 가장 먼저 이동녕과 상의할 정도로 이동녕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두터웠다”며 “임시정부 내부와 독립운동계는 이념과 학맥, 지역 간의 갈등, 독립운동 방략에 관한 견해 차이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이동녕은 누구보다 더 힘주어 그런 독립운동계의 단결을 주장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계의 원로이자 진정한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또한 봉오동·청산리대첩 유적지, 간도참변 사진 등을 보여주며 “조국의 독립은 수많은 독립군의 선혈로 쟁취되었다. 이를 기억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국학원 제199회 국민강좌는 2월 11일 오후 5시30분 서울시민청 바스락홀(B2)에서 열린다. 이날 이종호 박사(전 KIST 교수, 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가 "훈족의  영웅 아틸라와 한민족의 친연성”이라는 주제로 강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