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정수용)는 1월 8일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을 개최하고 이봉창 의사의 동경 폭탄투척 의거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제의 심장부인 동경(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조국의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렸고, 이는 통해 침체된 항일운동을 되살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는 1월 8일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을 개최했다.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는 1월 8일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을 개최했다.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이날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은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임직원,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광복회 등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과 회원, 시민, 학생 등 150여명이 참석해 국민의례, 홍인근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이사의 이봉창의사 약사 보고, 식사(式辭), 기념사, 헌화 순으로 열렸다.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정수용 회장은 식사에서 “지금으로부터 88년 전인 1932년 1월 8일 도쿄 경시청 앞에서는 세계를 격동시킨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의 의열 청년이었던 이봉창 의사가 조선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것이다. 청년이 바라던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동아시아 근대사에 한 획을 긋는, 청사에 길이 기록되었다.”며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민족해방운동의 틀을 일거에 깨뜨려 버린 것이었다. 그전까지 감히 그 누구도 꿈꾸어 보지 못한 대담한 일을 결행하였다.”고 말했다.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는 1월 8일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을 개최하고 이봉창 의사의 동경 폭탄투척 의거의 의미를 되새겼다. [사진=정유철 기자]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는 1월 8일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을 개최하고 이봉창 의사의 동경 폭탄투척 의거의 의미를 되새겼다. [사진=정유철 기자]

이어 정 회장은 “살아있던 신으로 떠 받들어지던 일왕은 그 순간 평범한 인간의 수준으로 격하되어 버렸다. 기세등등하게 침략의 기세를 높여가던 일본 내각은 총사퇴를 결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질서에 거대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중국정부는 이봉창 의사의 의거에 깊이 감명을 받아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 항일투쟁의 깃발을 휘날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정수용 회장이 1월 8일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정수용 회장이 1월 8일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특히 정 회장은 민족정신의 부활과 소생이야말로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이룩한 가장 값진 성과였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당시 일제 식민지 억압체제에서 신음하던 모든 이들에게 이봉창 의사의 소식을 어둠을 깨뜨리는 빛과 같았다. 조선청년의 심장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인가를 깨우쳐주었다.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애국청년들은 의열 투쟁의 상징인 상해로 모여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향한 해외동포들의 성원도 더욱 뜨거워졌다.”고 말했다.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1월 8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1월 8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정 회장은 “참된 의미의 투사였던 이봉창 의사는 우리 민족에게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과 큰 민족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연대의식과 형제애를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그 유산은 민족해방의 밑거름이 되었고, 해방 이후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기틀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은 기념사에서 “이 장쾌한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흥의 시발점이 되어 점차 사그라지던 조국 광복의 불꽃을 되살림으로써 독립운동사에 일대 전기가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일항쟁에 전력을 기울인 끝에 우리는 경술국치 36년만에 반만년의 장구한 역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가 처한 지금의 상황은 결코 만만하지 않지만, 태극기 앞에서 의연하게 위국헌신을 맹세하신 이봉창 의사의 간절하고 뜨거웠던 의기를 계승하면 이는 대한민국 앞길에 소중한 자산이 되어줄 것이다”고 말했다.

광복회 허현 부회장이  8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기 앞서 이봉창 의사 영정에 절을 올리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광복회 허현 부회장이 8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기 앞서 이봉창 의사 영정에 절을 올리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독립운동단체를 대표하여 광복회 김원웅 회장의 기념사를 허현 부회장이 대독한 후 정수용 회장,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허현 광복회 부회장 등이 헌화하고 묵념을 올렸다.

이봉창 의사(1901.8.10.~1932.10.10)는 서울 용산에서 보친 이진구(李鎭球)와 모친 손씨(孫氏) 아이에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정수용 회장이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이봉창 의사 영정 앞에 헌화를 한 후 절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정수용 회장이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이봉창 의사 영정 앞에 헌화를 한 후 절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열 살 때 용산의 문창학교에서 입학하여 4년만에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상점과 약국에서 5년간 일하며 일본말을 배웠다.

1919년 열아홉 살에 철도국으로 들어가 역부로 근무하기 시작하였으나 조선인을 차별하자 철도국을 그만두고 1925년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노동으로 생활을 하였다.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이봉창 의사 영정에 헌화하고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이봉창 의사 영정에 헌화하고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1928년 11월 히로히토 일왕 즉위식을 구경하려고 교토에 갔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9일간 구금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항일의식이 싹터 1931년 1월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하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김구 단장을 만나 김구 선생에게 일왕 처단을 제의하여, 김구 선생이 자금과 무기를 준비하였다.

“백범일지”에서 김구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온 이봉창 의사가 한 말과, 거사를 앞두고 사진 촬영 장면을 이렇게 적었다.

백범김구기념관에서 8일 열린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임직원이 헌화 후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백범김구기념관에서 8일 열린 제88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임직원이 헌화 후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이 앞으로 다시 31세를 더 산다하여도 과거 반생생활에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 하면 31년 동안 인생 쾌락을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 쾌락을 도(圖)키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을 목적으로 상해로 왔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1년여의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실행을 결심한 이 의사는,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후 폭탄 2개를 갖고 12월 7일 일본으로 향하여 12월 말 동경에 도착하였다.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이봉창 의사는  “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이봉창 의사는 “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이봉창 의사는 선서를 했다. 선서문은 이런 내용이다. “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13년 12월 일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 앞”

이봉창의사는 일본으로 떠날 때 기쁜 얼굴을 했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기념사진을 찍을 때에 내 낯에는 자연 회연(懷然)한 기색이 있든지 이씨는 나를 권한다.

“나는 영원 쾌락을 향(享)코저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양인이 희열한 안색을 띄고 사진을 찍읍시다.”

나 역시 미소를 띄고 사진을 찍었다.

일본에 도착한 이봉창 의사는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날을 거사일로 결정했다. 그해 1월 4일 이봉창의사는 상해 김구 단장에게 전보를 보내 “상품은 1월 8일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며 거사일을 알렸다.

이 의사는 거사일인 1932년 1월 8일 동경 경시청 앞에서 일왕 행렬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환국하는 일왕 히로히토가 나타나자 그를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은 일본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기수(日章旗旗手)와 근위병(近衛兵)이 탄 말 두 필 만을 거꾸러뜨리는데 그쳐, 일왕 폭살 계획은 안타깝게 실패로 돌아갔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제의 심장부인 동경(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조국의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렸다. [사진=정유철 기자]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제의 심장부인 동경(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조국의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렸다. [사진=정유철 기자]

그날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된 이 의사는 같은 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치가야 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비록 일왕 폭살에는 실패하였지만, 그의 의거는 1930년대 한국 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 투쟁의 선봉으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항일운동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虹口公園, 루쉰공원) 의거가 일어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악화되었던 한중 간 감정 대립도 씻는 계기가 되었다.

이봉창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김구 선생에 의해 국내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하였다. [사진=정유철 기자]
이봉창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김구 선생에 의해 국내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하였다. [사진=정유철 기자]

 

이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김구 선생에 의해 국내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는 1995년 효창공원에 이봉창 의사의 동상을 건립하여 의사를 기리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는 1995년 효창공원에 이봉창 의사의 동상을 건립하여 의사를 기리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는 1995년 효창공원에 이봉창 의사의 동상을 건립하여 의사를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