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는 안중근 의사의 공판 장면을 시간의 흐름대로 스케치한 그림과 공판 방청권 2점, 안 의사의 옥중 유묵(遺墨, 생전에 남긴 글씨) 3점, 총 5점을 문화재청에 국가문화재로 등록‧지정신청 했다고 11일 발표했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체포되어,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단 7일 만에 6회에 걸쳐 공판을 받고,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일본 도요신문사 고마쓰 모토코 기자가 직접 그린 안중근 의사의 공판 장면 스케치. [사진=서울시]
일본 도요신문사 고마쓰 모토코 기자가 직접 그린 안중근 의사의 공판 장면 스케치. [사진=서울시]

서울시가 등록문화재로 요청한 공판 관련 자료 2점은 일본 도요신문사 고마쓰 모토코(小松元吾) 기자가 직접 그린 스케치 그림 ‘안봉선풍경 부 만주화부(安奉線風景 附 滿洲畫報)’와 본인이 배부 받은 공판 방청권이다. 이 2점은 고마쓰 모토코 기자의 후손인 고마쓰 료 씨가 지난 2016년 ‘안중근의사 숭모회’에 기증했다.

스케치에는 호송마차를 타고 오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부터 공판에 출석한 안 의사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의 뒷모습, 일본인 재판관계자인 마나베 주조 재판장, 미조부 치 타카오 검사, 소노키 통역관과 영국인 더글라스 변호사 등 주요 인물과 장면이 그림과 설명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외신기자들의 생생한 표정과 실랑이가 일어난 방청석 모습을 통해 불공정하게 진행되었던 공판 상황도 담겨 있다.

일본 도요신문사 고마쓰 모토코 기자가 배부받은 안중근 의사 공판 방청권. [사진=서울시]
일본 도요신문사 고마쓰 모토코 기자가 배부받은 안중근 의사 공판 방청권. [사진=서울시]

공판 방청권은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서기과에서 발급된 제122호라고 표기되어 있고 우측에 ‘4회(四回)’라는 고무인이 날인되어 고마쓰 모토코 기자가 1910년 2월 10일 열린 4회 공판에 참석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뒷면에는 기자가 ‘명치 43년 2월 7일부터 16일까지 관동부 여순지방법원에서 안중근 사건 방청 기념’이라고 쓴 문구가 있다.

서울시는 그동안 공판 장면이 담긴 사진자료들이 공개된 적은 있으나 정확한 공판 날짜가 확인된 자료는 이번 자료는 유일하며, 재판 참석자 및 재판 분위기를 그림으로 남겨 근대 동아시아 국제법 사료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로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문화재를 소유한 일본인 후손이 안 의사의 애국정신과 동양평화사상을 기리는 국내단체에 기증함으로써 한일관계의 융화적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시가 문화재청에 보물 지정을 신청한 안중근 의사의 유묵 3점. [사진=서울시]
서울시가 문화재청에 보물 지정을 신청한 안중근 의사의 유묵 3점. [사진=서울시]

아울러 서울시가 보물지정을 신청한 안중근 의사의 옥중 유묵 3점은 공판 과정에서 안 의사의 언행에 감복한 일본인의 요청으로 쓴 것이다.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한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不如一敎子)’는 황금 백만냥이라도 자식 교육 잘 시키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교육가로서 안 의사의 철학이 담겼다.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소유하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기탁한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殺身成仁)’은 뜻 있는 사람과 어진 사람은 자신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는 뜻이며, 개인이 소장한 ‘세심대(洗心臺)’는 마음을 씻는 곳이란 뜻이다. 작품 하단에 단지동맹 때 왼손 약지를 자른 장인이 찍혀 있어, 이를 통해 진본임을 재검증했다.

유묵 3점을 심의한 서울시문화재위원회는 글씨 조형 분석을 통해 31세 젊은 사형수 안중근의 심리적 동요와 번민이 글씨로서 표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