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선생의 도교제국호텔 연설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심포지엄이 11월 27일 오후 한국언론진흥재단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몽양어운형기념관이 주관한 이 학술심포지엄에서는 ‘3.1운동의 대단원 몽양 여운형 도쿄제국호텔 연설’이라는 주제로 한국과 일본 연구자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몽양 여운형 선생의 도교제국호텔 연설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심포지엄이 11월 27일 오후 한국언론진흥재단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사진=정유철 기자]
몽양 여운형 선생의 도교제국호텔 연설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심포지엄이 11월 27일 오후 한국언론진흥재단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사진=정유철 기자]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이부영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19년 11월27일 일본 수도 한복판에 있는 도쿄제국호텔에서 조선 독립을 주장하는 사자후 연설을 했다. 선생은 그 1년 전인 1918년 11월 28일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단을 결성하여 파리평화회의 앞으로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우사 김규식 선생을 파리평화회의의 대표로 파견하는 동시에 신한청년단 동지들을 일본 도쿄와 만주 등지를 거쳐 국내로 보내고 자신은 만주 창춘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가서 3.1운동의 불씨를 지폈다”고 소개했다.

이부영 이사장은 “3.1운동 이후에도 여운영 선생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숨은 주역의 역학을 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몽양 여운형 선생을 독립운동 대열에서 이탈시켜 친일 자치주의자로 회유하고자 일본으로 초청했다. 하지만 여운형 선생은 이를 역이용하여 적진 한 가운데 뛰어들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당당히 알리고 독립운동의 노선과 독립 이후 국가건설의 방향성까지 천명했다”고 말했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환영사에서 “양평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 태어나 자란 고향이며 여전히 선생이 남긴 온기가 남아 있고 정신이 깃들어 있는 지역이다. 이렇게 위대한 민족지도자의 업적을 선양하고 축하할 수 있다는 것은 양평군이 가진 축복이 아닐 수 없다”며 “‘3.1운동의 대단원 몽양 여운형 도쿄제국호텔 연설’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선생의 업적과 정신에 대한 학술적 정리를 넘어 우리 민족이 자긍심을 갖고 그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주제 발표에서는 제1주제로 “3.1운동 이후 일본의 식민지통치정책 변화와 여운형 초청”을 주제로 발표한 미쓰이 다카시 도쿄대학교 총합문화연구과 교수는 “조선의 ‘자치’를 미끼로 조선인 민족주의자로서 영향력이 강한 여운형의 포섭을 노렸으나, 애당초 여운형의 배경에 있는 임정의 방침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으며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는 자치를 도입할 생각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제국호텔 연설에서는 조선의 ‘자유 독립’의 필요성을 당당히 말함으로써 여운형 초청은 실패였다. 여운형의 도쿄행이 가져온 효과는 그러한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의 모순을 드러낸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초기 동향과 여운형의 일본 방문”을 발표한 윤대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원은 “여운형이 일제의 도일공작에 응해 도일했던 1919년 11월 14일부터 12월 10일까지 약 4주간에 걸쳐 여운형일행의 도일문제는 상하이 한인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는데, 이 사건 자체는 여운형 일행이 상하이에 돌아온 뒤 조용히 마무리 되었다”며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 사건은 여운형 개인의 도일문제였지만 찬반 논쟁 과정에서 임시정부가 이후 급격한 독립운동 노선의 분화를 예고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둘째는 여운형 개인으로는 도일을 계기로 새로운 활동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후 여운형이 비록 실패했지만 적극적인 임시정부 특사로 소련 방문을 주장하고 상하이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고 발표했다.

“여운형 일본 방문과 도쿄제국호텔 연설의 역사적 의의‘를 발표한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은 ”여운형의 도쿄 항쟁은 조선의 독립이 동양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며 동양 평화를 위해 조선 독립을 천명했으며, 인민 주권의 민주공화국이라는 발언으로 천황제 아래 사실상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체제를 고수하던 일본과 달리 독립 운동 진영이 민주주의의 실현에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은 이어 "여운형은 ’도쿄항쟁‘을 계기로 일본과의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는 독립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고 그후 독립운동 노선도 ‘혈전’노선으로 전환되었다"고 밝혔다.

“일본 언론보도를 통해 본 여운형의 일본 방문”을 발표한 이규수 히토츠바시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교수는 “여운형 공작은 당국의 철저한 통제 아래 극비리에 추진되었기 때문에 여운형 방일 초기에는 일본의 언론 보도 역시 통제되었다. 보도 금지 조치가 해제된 뒤 제국호텔에서의 연설 내용을 중심으로 관련 기사가 게재되기 시작하였다. 언론보도에서 여운형은 전형적인 ‘불령선인’의 모습으로 비춰졌다”며 “제국호텔에서의 연설내용과 아카사카 이궁 방문은 여론을 악화시켰다. 제국의회에서의 하라 내각과 사이토 총독에 대한 비판적인 질의응답이 여러 차례 게재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운형 회유 공작 실패 책임을 둘러싼 일본 정계의 공방은 결국 정치적인 수습을 통해 봉합되었다. 일본은 이후 여운형을 더욱 철저히 감시했고, 여운형에게 다시 추파를 보낸 것은 일본의 패전을 전후한 시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윤경로 몽양여운영기념관 관장을 좌장으로 홍종욱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교수, 한시준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초빙교수, 전상숙 광운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서민교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 책임연구원이 토론자로 참가하여 논의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