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스피릿은 올해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일항쟁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10명을 선정했다. 코리안스피릿이 선정한 독립운동가는 석주 이상룡(1858-1932), 홍암 나철(1863-1916), 우당 이회영(1867-1932), 홍범도 장군(1868-1943), 남자현 여사(1872-1933), 주시경(1876-1914), 단재 신채호(1880-1936), 서일(1881-1921), 김좌진 장군(1889-1930), 이봉창 의사(1901-1932)이다.

10월에 소개한 김좌진 장군에 이어 이봉창 의사를 국가보훈처의 공훈록 등 자료를 기초로 소개한다.

이봉창 의사(李奉昌, 1901. 8. 10 ~ 1932.10.10)는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효녕대군(孝寧大君) 후손인 부친 이진규(李鎭奎)씨와 모친 밀양 손씨(密陽孫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있는 이봉창의사 묘소. 이봉창 의사는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한민족의 자존과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렸다.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서울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있는 이봉창의사 묘소. 이봉창 의사는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한민족의 자존과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렸다.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선생은 10살에 용산의 사립 문창학교(文昌學校)에 입학하였으며 4년 후 졸업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았다. 19세 때 남만철도회사(南滿鐵道會社) 용산정거장에 운전견습생으로 일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선생은 부모나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수모와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선생은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남만에서 철도원 생활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상점 점원이나 철공소 직공·잡역부·날품팔이 등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일인 생활을 익혔다.

선생은 1931년 1월 중순, 독립운동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은 일본말 섞인 한국말을 하며 임시정부를 일제가 부르던 식으로 가정부(假政府)라고 하는 선생을 수상히 여겨 문밖으로 내쫓으려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구(金九)는 일단 사무원인 김동우(金東宇)에게 선생이 묵을 여관을 잡아주라고 일렀다.

며칠 후, 선생은 직원들과 함께 술과 국수를 사다가 같이 먹으면서 취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누게 되었다. “당신들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왕은 왜 못 죽입니까?” “일개 문무관(文武官)도 죽이지 쉽지 않은데, 일왕을 죽이기가 어디 쉽겠소?” “내가 작년 동경에서 일왕이 능행(陵幸)한다고 행인을 엎드리라고 하기에 엎드려서 생각하기를 내게 지금 폭탄이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의 이 말은 당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심하던 한인애국단의 김구 단장을 고무하기에 충분하였다. 얼마 뒤 김구는 선생을 만나 그의 진심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 김구 단장을 감복시킨 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인생관이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뜨거운 동지애로 의기투합하였고 선생의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약 일 년의 준비기간을 두고 자금과 폭탄은 김구가 준비하기로 하였으며, 선생은 준비기간 동안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김구를 만나 거사를 계획·준비하였다. 1931년 12월 선생과 김구가 약속한 지 일년이 거의 다 되어 미주 동포사회에서 거사에 필요한 폭탄도 준비되었다. 폭탄은 두 개였는데, 한 개는 김홍일(金弘壹)을 시켜 상해 병공창(兵工廠)에서, 또 한 개는 김 현(金鉉)을 하남성(河南省) 유 치(劉峙) 장군에게 보내어 구해온 것이다. 드디어 1931년 12월 13일 선생은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였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함으로써 결의를 다졌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이튿날 선생의 장거를 위한 송별회를 열었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때 김구는 비장감에 젖어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는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라고 하여 김구를 위로하였다. 1931년 12월 17일 김구 단장의 전송을 받으면서 목하창장(木下昌藏)이라는 일본이름으로 가장하여 동경으로 출발하였다.

영천환(永川丸) 선편으로 고베(神戶)를 거쳐 동경(東京)에 도착한 선생은 미장옥(尾張屋)여관에 묵으면서 일왕의 일정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해 12월 말경 선생은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동경 교외에 있는 요요기(大大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입수하였다. 그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상해의 김구 단장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전보를 보내 거사일을 알렸다.

1932년 1월 8일 선생은 앵전문(櫻田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행렬이 나타나자 때를 놓치지 않고 군중 속에서 몸을 일으켜 일왕을 향하여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그러나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기수(日章旗旗手)와 근위병(近衛兵)이 탄 말 두 필 만을 거꾸러뜨리고 말았다.

선생은 현장에서 붙잡혔고 같은 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선고하여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비록 선생이 일왕 히로히토를 폭살하는데 실패는 하였지만, 그 장거는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다. 또한 선생의 의거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전선에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였고, 만보산(萬寶山) 사건이래 한·중민의 감정대립도 씻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선생의 장거가 있자 1932년 1월 9일자 중국의 신문들은 동경발 기사로 이 장거를 즉각 보도하면서, "일왕이 불행히 맞지 않았다"라고 표현하며 그들도 일왕이 폭살되지 않았음을 매우 애석히 여기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봉창 의사의 장거가 갖는 더 중요한 의미는,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광복 후 귀국한 김구 선생이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정부는 이봉창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