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박은식(1859.9.30 ~ 1925.11.1.) 선생’을 ‘2019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백암박은식선생전집편찬위원회가 2002년 순국 77주년기념으로 펴낸 《백암박은식전집》을 참고하여 선생을 소개한다.

백암 박은식 선생은 1859년 9월 30일(양력 10월 25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선비 박용호(朴用浩)씨와 어머니 노(盧)씨 사이에 태어났다. 다섯 형제 중 네 형제가 일찍 죽고 홀로 장성하였다. 호는 백암(白巖, 白庵) 또는 겸곡(謙谷)이라 하였으나 인식(寅植, 仁植), 기정(箕貞), 승언(承彦) 등의 별명과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 등의 별호 또는 필명을 쓰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 초상화.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2019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박은식 선생을 선정했다. [사진=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 초상화.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2019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박은식 선생을 선정했다. [사진=국가보훈처]

일찍이 공부를 시작하면 단명한다는 민속에 따라 10세가 된 1868년에야 동네 서당에 입학하였다. 재주가 뛰어나 2~3년 사이에 이미 동네의 신동으로 소문이 났으며, 특히 시문(詩文)에 능했다.

사서삼경, 제자서 등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당시 학풍이 대부분 과거시험만을 염두에 두어 시부(詩賦) 같은 것에 치우치는 모순을 깨닫고 도학, 정치, 문장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을 공부하였다. 17세(1875) 무렵부터는 신천군의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安泰勳)과 교유하였다. 이 두 사람은 뛰어난 문장으로 황해도의 두 신동으로 일컬어졌다.

19세(1877년)에 부친 박용호 씨가 별세하여 일찍이 연안 차씨와 약혼을 했으나 결혼은 삼년상 후로 미루었다 21세(1879년) 결혼한 후 평남 삼등현(三登縣)으로 이사하였다. 22세(1880년)에 경기도 광주 두릉(斗陵)에 가서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에게서 고문학을 배우고, 다산학(茶山學)에 심취하여 다산 정약용의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 저술을 섭렵하였다.

1882년 7월 서울에서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난국을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여 정부에 제출하고자 하였으니 뜻과 같이 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와 평남 안변 산중에서 학문에 힘써 ‘유문입도(由文入道)’와 ‘반궁실천(反躬實踐)’의 요체를 자득하였다.

1885년 27세에 어머니 노씨의 명에 따라 향시를 보았다. 관찰사 남정철이 재질을 알아 특선으로 뽑혔다. 1888년 30세 때 민영준(閔永駿)의 추천으로 숭인전(崇仁殿) 참봉에 제수되었다. 1892년 동명왕의 능령(陵令)으로 자리를 옮겨 황해도 중화군에 거주하였다. 이는 왕릉이 중화 오봉산 아래 진주동에 있으므로 관찰사 민병석(閔丙奭)이 선생의 학문 연찬을 도우려는 배려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박은식 선생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1년 발간한 《대동고대사론》 등은 민족교육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사진=독립기념관]
박은식 선생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1년 발간한 《대동고대사론》 등은 민족교육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사진=독립기념관]

 

 1989년(40세) 이 무렵부터 격변하는 세태에 부응, 서구 근대문물을 수용하려는 애국계몽사상가로 크게 변신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주자(朱子)의 세계에서 벗어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종지로 하는 양명학을 탐구하면서 근대문물수용의 정신지주로 삼았다. 9월에 장지연, 유근(柳瑾), 남궁억 등이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하여 ‘황성신문’으로 개제하여 간행하자 장지연과 함께 주필에 취임하였다. 또한 김윤식, 신기선, 이도재 등과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문교부문에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된 후에 1900년 42세에 경학원(經學院)의 강사로 초빙되어 곽종석과 함께 경학을 강의하고,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으로 취임하여 국민교육 담당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1902년 ‘흥학설’을 지어 학부에 교육개혁을 건의하였다. 1900~1904년에 저술한 《학규신론(學規新論)》을 1904년 11월 박문사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은 교육과 종교에 관한 현안문제를 13항목으로 나누어 논술한 것으로 유교개혁과 신교육사상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문헌이다. 1905년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로 ‘황성신문’이 탄압을 받자, 영국인 베델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구국계몽논설을 주도하였다.

1908년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통합하여 서북학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동회의 회지 ‘서북학회월보’의 주필이 되어 애국계몽 논설을 거의 매호 발표하여 한말계몽사상을 주도하였다. 특히 ‘서북학회월보’(1909)에 발표한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은 한말 유교의 근대화 또는 조선화 운동을 주도한 중요한 논설로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박은식 선생은 1920년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항일무장 투쟁까지의 일제침략에 대한 한국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하여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하였다. [사진=국가보훈처]
박은식 선생은 1920년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항일무장 투쟁까지의 일제침략에 대한 한국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하여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하였다. [사진=국가보훈처]

1909년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서북협성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민족고전의 보급이 시급함을 역설하고 최남선과 광문회(光文會)를 조직하여 《동국통감》 등 고전 17종을 간행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이후 조선총독부가 모든 언론기관의 문을 닫고 국학문헌을 압수 소각하자 선생은 “국체(國體)가 수망(雖亡)이나 국혼(國魂)이 불멸하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국사책마저 분멸(焚滅)하니 통한불이(痛恨不二)라”, “일언일자의 자유가 없으니 오로지 해외로 나가서 4천년 문헌을 모아서 편찬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국혼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개탄하고 망명을 계획하였다. 이듬해 4월 보인 연안 차씨가 병사한 후 5월 국경을 넘어 만주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환인현 흥도천에 대종교 포교사 윤세복의 집에 기거하면서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몽배금태조》 《명림답부전》 《천개소문전》 《대동고대사론》 《단조사고》 등을 저술, 등사판본을 만들어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민족교육의 교재로 사용하였다.

1912년 3월부터 봉천, 북경, 천진, 상해, 남경, 홍콩 등지를 돌아다니며 망명지사와 중국인 지사를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숙의하였다. 7월에는 신규식, 홍명희 등과 함께 동주공제(同舟共濟)한다는 뜻으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총재로 추대되었다. 동제사는 상해에서 결성한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이다. 북경에서 《안중근전》을 저술하였다.

대동단결선언. 박은식 선생은 1917년에는 독립운동가 14명 중 한 사람으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독립운동 세력의 단결을 촉구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대동단결선언. 박은식 선생은 1917년에는 독립운동가 14명 중 한 사람으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독립운동 세력의 단결을 촉구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1913년 신건식 등과 함께 상해로 가서 프랑스 조계에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하였다.

1915년에 《한국통사(韓國痛史)》를 간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대외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고, 대내로는 민족의 통분과 적개심을 유발하면서 동포들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였다. 《한국통사(韓國痛史)》는 대원군 집정에서부터 경술국치 전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근대역사학의 방법론을 도입하여 저술한 것으로 한국민족사학상 불후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중국변법사상가 강유위(康有爲)는 박은식을 “필법이 사마천의 정수를 얻었다”고 상찬하며 《한국통사(韓國痛史)》의 서문을 썼다.

또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당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선생은 이 단체의 취지서와 규칙을 지었으며 감독으로 추대되었다. 1917년에는 독립운동가 14명 중 한 사람으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독립운동 세력의 단결을 촉구하였다.

1918년 60세에 러시아 연해주 동포들의 간청으로 상해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우스리스크 쌍성자(雙城子)에 머물며 《발해사》와 《금사》를 한글로 역술하고, 《이준전》을 저술하였다. 또 각지 한인학당을 순방하며 한국역사를 강연하여 동포의 민족사상을 일깨웠다.

1919년 노령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이한 선생은 육순의 나이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대한민국의회가 주동한 그 지역 독립운동의 ‘선언서’를 짓고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 본부를 둔 대한국민노인단 조직에 적극 참여하여 ‘취지서’와 일본정부에 보내는 ‘독립요구서’를 지었다. 노인단은 조직된 지 수개월만에 단원이 수천명이 되고 각지에서 각종 활동을 활발히 개시하였다.

박은식 선생 서거 소식과 유언을 전한 독립신문 호외(1925.11.2)[사진=독립기념관]
박은식 선생 서거 소식과 유언을 전한 독립신문 호외(1925.11.2)[사진=독립기념관]

 

이로써 그해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그리고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의 통일을 추진하여 통합 임시정부가 발족하는 데 기여하였다.

선생은 이해 임시정부사료편찬회에 참여하여 《한일관계사료》 4권 편찬에 기여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1920년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항일무장 투쟁까지의 일제침략에 대한 한국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하여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하였다.

박은식 선생 서거 보도기사. [사진=국가보훈처]
박은식 선생 서거 보도기사. [사진=국가보훈처]

1922년 상해에서 추진된 ‘국민대표회의’의 준비위원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24년 ‘독립신문’ 사장이 되었고 12월에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고 대통령대리를 겸하였다. 1925년 3월에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고 이어 선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취임하였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결속시키기위해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중심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령(國務領)중심제로 바꾸었다. 그 해 8월 선생은 만주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의 지도자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고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선생은 1925년 11월 1일 오후 7시 상해에서 서거하였다. 그해 7월 인후염으로 고생하다 기관지염으로 전이하여 악화되어 끝내 별세했다. 선생은 다음과 같은 간곡한 ‘유촉’를 남겼다.

“첫째 독립운동을 하는 데는 먼저 전족적(全族的) 통일을 힘쓰라.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운동으로 하야 모든 수단과 방략을 가리지 말라. 셋째 독립운동을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는 애증친소의 별(別)이 없어야 한다.”

백암박은식선생전집편찬위원회가 2002년 순국 77주년기념 《백암박은식전집》 전6권을 간행하였다. [사진=정유철 기자]
백암박은식선생전집편찬위원회가 2002년 순국 77주년기념 《백암박은식전집》 전6권을 간행하였다. [사진=정유철 기자]

임시정부는 11월 4일 최초 국장으로 상해 정안사로(靜安寺路) 공동묘지 600번지에 예장하였다.

순국 후 37년만인 1962년 정부는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정부는 상해 만국공원에 묻혔던 유해를 1993년 8월 고국으로 봉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였다.

1975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가 선생의 유고를 모아 《박은식전서》전 3권을 발행하여 박은식 연구에 큰 전기를 마련하였다. 백암박은식선생전집편찬위원회가 2002년 순국 77주년기념 《백암박은식전집》 전6권을 간행하였다.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2019년 11월의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11월1일부터 30일까지 한달 간 개최한다.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 6관 통로)에  박은식 선생 사진 등 8점을 전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