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욱)은 10월 8일부터 12월 21일까지 장서각에서 ‘조선왕실의 비석(碑石)과 지석(誌石) 탑본(搨本)’ 특별전을 개최한다. 탑본은 석비와 목판을 먹으로 찍어내거나 글씨를 베껴 쓴 것을 말한다.
이번 특별전에는 장서각이 유일하게 소장한 300년간(광해군~대한제국) 제작된 조선왕실의 탑본 556점 중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유물을 선정하여 일반에 최초로 공개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장서각의 탑본은 문예에 뛰어난 찬자가 글을 짓고, 이를 당대의 명필이 쓴 것을 최고의 장인이 돌을 다듬어 글자를 새기고, 이를 탑본하여 아름다운 문양으로 직조된 비단으로 꾸민 조선 왕실문화의 정수이자 조선의 귀중한 기록유산이다.
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각의 비석(碑石)과 죽은 이의 생애를 기록하여 땅에 묻은 지석(誌石) 탑본이 498점이며, 조선왕실의 창업과 관련한 곳과 국난을 극복한 곳 등 기념비가 될만한 장소에 후대 왕들이 글을 짓고 비석을 세워 탑본한 것들도 58점 전한다.
조선은 왕실이 주도하여 비석과 지석을 제작한 당시에 이를 탑본해 보관하여 당대의 글씨와 장황의 아름다움 그리고 이를 제작한 수준 높은 기술 등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모되거나 왕릉을 옮기면서 옛 비석을 땅에 묻기도 하고, 또는 옛 비석을 깎아 글을 새로 새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장서각의 탑본을 통해 그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지석은 땅에 묻기 때문에 발굴을 하지 않으면 원형을 파악할 수 없으나 장서각의 탑본을 통해 크기(가로 약 150cm×세로 약 150cm)와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번 특별전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효종 영릉을 천릉할 때 함께 묻기 위해 제작한 청화백자 지석 3편을 처음 공개하였다. 왕릉의 지석은 보통 큰 판석으로 만든다. 이 경우 제작하고 옮기는 과정에서 많은 백성이 어려움을 겪자 효종의 영릉을 여주로 천릉하면서 시험 삼아 도자기로 지석을 만들었다.
청화백자 지석 제작 과정 중 시제품 3편을 만들어 왕이 직접 어람하여 왕실에 보관했던 것을 후에 영조가 다시 어람하여 왕릉 지석을 도자기로 만들 것을 지시했다는 기록이 의궤에 나오는데 이와 일치하는 3편의 청화백자 지석 원본 시제품을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전시의 또 하나의 백미는 탑본을 더욱 아름답게 꾸민 여러 가지 비단 장황으로, 300년의 조선왕실의 장황 형식을 연대순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영조 대 초기까지 복숭아·석류·포도·연꽃·난초 등 아름답고 다양한 문양으로 직조한 비단으로 탑본을 꾸몄다면,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았던 영조 대 후기부터는 무문의 비단으로 바뀌고, 대한제국 시대로 가면 장황의 비율도 변한다.
특히 장황과 관련하여 그동안 여러 가지 용어를 혼용하였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의궤 등의 문헌을 통해 장황과 관련된 용어들을 정리했따. 또한 출처가 분명하지 못한 채 오늘날 제작된 족자 장황에 전통에 근거한 모범 답안을 제시해 앞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시각화했다. 장황은 그림이나 글씨 등 서화에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족자·병풍·두루마리·책첩 등의 형태로 꾸미는 표지장식이다.
조선왕실의 창업과 관련된 장소에 세운 기적비(紀蹟碑) 탑본은 북방지역과 관련한 조선왕실의 새로운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대부분 북한의 개성·함경도 지역에 소재한 이 비석의 탑본은 숙종~고종 대에 이르는 왕실 추숭사업의 결과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북한에 소재하는 비석의 경우 현재 비석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문헌의 기록과 장서각의 탑본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이번 특별전은 월~토요일 오전 9시 30분~오후 5시 30분까지 운영되며, 일요일은 휴관이다. 문의 전화: 031-730-8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