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주석이던 석오 이동녕(1869~1940) 선생은 “우리 민족의 뿌리는 단군이다. 우리는 이 단군 왕검의 개국과 이어지는 전통을 이어 독립운동의 역사적 정신적 맥으로 삼아 지켜 나가야 한다.”고 했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개천절을 맞아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었던 단군의 영정을 포함한 관련유물100여 점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회가 눈길을 끈다.

개천절을 맞아 서울 종로구에 있는 수운회관 4층 대전시실에서 '독립운동의 상징, 단군 영정 전시회'가 오는 10월 15일까지 열린다. [사진=김경아 기자]
개천절을 맞아 서울 종로구에 있는 수운회관 4층 대전시실에서 '독립운동의 상징, 단군 영정 전시회'가 오는 10월 15일까지 열린다. [사진=김경아 기자]

7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수운회관 4층 대전시실에서 열린 ‘독립운동의 상징, 단군 영정 전시회’를 찾았다. 이번 전시회는 지난 9월 26일 시작되어 오는 10월 15일까지 열리며,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누구나 관람이 가능하다.

전시실에는 단군영정을 봉안한 시기가 1883년으로 명확하게 기록된 영정부터 광복 무렵 제작된 단군상, 제작시기가 확인되지 않은 단군영정들까지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지난 2009년(단기 4342년) 강용운 화백이 극세필로 천부경 글자만으로 그린 단군 영정도 있었다.

또한 호방한 느낌으로 그려진 북한의 단군영정 5점과 수놓은 작품 1점, 단군 왕검의 부인인 비서갑부인의 영정도 있었다. 관련 유물 중에는 조선시대 치러진 과거시험에서 단군을 시제로 하여 차하(次下)로 급제한 급제자의 시권지도 있어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도 단군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자료도 있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영정 우측 하단에 1883년 봉안된 것이 화기(畵記)로 기록된 단군영정과 우리나라가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광무9년)에 세워진 천부경 각석이었다.

1883년 봉안된 단군영정의 밑그림 초본(왼쪽)과 채색도(오른쪽). 다른 단군 영정과 달리 하의가 흰색과 주황, 파랑, 적갈, 초록색의 색동치마와 같다. [사진=김경아 기자]
1883년 봉안된 단군영정의 밑그림 초본(왼쪽)과 채색도(오른쪽). 다른 단군 영정과 달리 하의가 흰색과 주황, 파랑, 적갈, 초록색의 색동치마와 같다. [사진=김경아 기자]

1883년 단군영정의 화기에는 영정이 청나라 연호인 광서9년(고종 20년) 10월에 봉안되었고, 김관오라는 편수(조선 후기 목수)가 김환, 이두성의 시주를 받아 제작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닥종이로 만든 밑그림 초본과 그 위에 얇은 비단으로 덧대어 놓고 채색한 그림을 분리하여 나란히 전시했다.

특이한 점은 다른 단군 영정과 달리 하의가 흰색과 주황, 파랑, 적갈, 초록색의 색동치마와 같다는 점이다. 박선식 부원장(단군학자료원)은 “일반적인 오색(黑白赤靑黃)과 달리 검은색 대신 초록색인 점이 특이하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무속화다운 도상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반면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5세기 고구려 수산리벽화의 색동치마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다카마스고분의 색동치마와 연관해 고구려적인 기법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영정의 또 다른 특징으로 “초본 왼쪽 위에 있는 범어로 적힌 글과 단군의 머리 주변을 밝히는 광휘가 채색된 그림에서는 생략된 점도 눈에 띈다.”고 지적했다.

충청남도에서 발견된 천부경 각석으로,  1905년(광무 9년)에 세워졌다고 새겨져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충청남도에서 발견된 천부경 각석으로, 1905년(광무 9년)에 세워졌다고 새겨져 있다. 오른쪽 전시물 중 하단의 긴 나무는 각석이 세워진 산각의 상량목. [사진=김경아 기자]

전시관 왼쪽 유리관에 보관된 천부경 각석은 길이 84cm이며, 매립된 부분을 제외하면 65.5cm로 아담했다. 정면에서 보면 국자와 같은 모양 위에 《천부경》의 첫 시작인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이 새겨있고, 측면은 뚫을 곤(丨)와 같은 얇고 곧은 모양 위에 ‘일적십거(一積十鉅)’와 ‘광무9(光武九)’가 새겨져 있다.

충청남도에서 발견된 이 각석은 대나무밭 위 언덕에 자리 잡은 작은 산각(山閣)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세워진 천부경 각석의 탁본 포스터. [사진=김경아 기자]
1905년 세워진 천부경 각석의 탁본 포스터. [사진=김경아 기자]

박선식 부원장은 “이 각석이 발견된 곳에서 함께 발굴된 대들보 위 마룻대(상량목)에 광무5년(1901)년 2월 13일 축시에 낙성식을 했다고 되어있다. 축시(丑時 새벽1시~3시)는 민속학적으로 땅의 기운이 올라오는 때를 상징하는데 예사롭지 않은 새벽에 상량식을 했다는 것은 국운이 기우는 때에 새롭게 국운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을 것”이라며 “상량 4년 후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당한 때, 천부경 각석을 세운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특히, 대종교가 중광된 1909년 이전에 이미 천부경이 전승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 의미가 크다.”라고 했다.

그는 “상량목에는 집주인이 계유생이라고 밝혔는데, 1873년이다. 추정컨대 천안 출신 독립운동가인 성달영 선생으로 보고 연구 중”이라고 밝혔고, 본인의 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정면은 국자모양의 북두칠성으로 보고 있다, 북두칠성은 생명의 회복, 소생과 연관된다.”고 밝혔다.

(시계방향으로) 북한의 단군영정들,  일본에서 간행된 '환단고기' '부도지' 일본어 번역서와 단군동화  및 북한자료들, 해방무렵 제작된 단군상들, 3대 경전 '천부경' '삼일신고' '성경팔리(참전계경)' 초간본과 1979년 '환단고기' 최초본. [사진=김경아 기자]
(시계방향으로) 북한의 단군영정들, 일본에서 간행된 '환단고기' '부도지' 일본어 번역서와 단군동화 및 북한자료들, 해방무렵 제작된 단군상들, 3대 경전 '천부경' '삼일신고' '성경팔리(참전계경)' 초간본과 1979년 '환단고기' 최초본. [사진=김경아 기자]

전시관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마련된 간도의 명동학교 교가와 현재의 애국가 이전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 사인’에 맞춰 불렀던 김인식의 애국가도 기록되어 있었다. 박 부원장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 교가에도 ‘한배검’이 명시되고, 찬송가로 불렀던 ‘올드랭 사인’에 맞춘 애국가 가사에도 ‘단군자손’이 나온다. 아직도 단군을 종교적 시각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일항쟁기 단군은 역사이고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라고 강조했다.

전시장에는 이외에도 단군사상을 담은 3대 경전으로 일컫는 《천부경》, 《삼일신고》, 《성경팔리(참전계경)》 초간본, 그리고 대일항쟁기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천부경》 한글본, 1979년 《환단고기》 최초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 가지마노부루가 1982년 펴낸 《환단고기》, 《부도지》일본어 번역서, 일본에서 간행된 단군동화, 일본 히꼬산 신궁 속 단군의 영정을 모사한 것일 가능성이 제기된 후지와라 고유(藤原桓雄)의 상 그림 등 다양한 유물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