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8배 크기인 몽골은 총인구 323만 명 중에 수도 울란바타르 인구가 그 반인 약 150만 명이다. 역사가 360년 넘는 울란바타르는 해발 1,300미터 고원에 산으로 둘러져 일교차, 연교차가 매우 심하다. 울란바토르의 급격한 인구 증가는 실업과 가난으로 서부지방 사람이 이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1960~1970년대 우리의 근대화 과정과도 비슷하다.

울란바토르는 인구가 많고 건물이 밀집하여, 러시아워에는 자동차가 넘쳐나고, 세계적인 고급차도 많이 보인다. 물론 차는 생산하지 않으니 죄다 외제 수입차이다. 변변한 생산시설이 없는 몽골에서는 이상할 것 같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특산물을 굳이 꼽자면 고급 모직의 대명사인 카시미아가 있는데, 양털이 아니라 ‘카시미아’라는 염소의 가슴 털을 말한다. 밤늦도록 불빛이 꺼지지 않는 도시의 모습이 중국, 러시아, 한국 등의 대도시 밤 문화와 비슷하다.

흔하지 않은 ‘몽골의 장마’ 같은 날씨이지만 ‘ㅂ’님의 정성 어린 안내로 다시 울란바타르를 돌아본다. 크지는 않지만 많은 소장품을 자랑하는 몽골국립박물관에서 눈에 끄는 사진이 있다. 몽골 출신 우주인 ‘구르락차’의 1980년대 사진이다. 이보다 20년 전 세계 최초의 우주인 소련의 ‘유리 가가린’은 보스토크 1호에 올라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그는 우주 궤도에 진입한 뒤 “지평선이 보인다. 하늘은 검고 지구의 둘레에 아름다운 푸른색 섬광이 비친다.”라는 말을 지구로 전해왔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는 2008년 이소연 씨가 최초의 우주인이 된다. 소련 우주인보다 47년, 몽골인보다 28년 뒤의 일이다. 이제는 우리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안에서 밖으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과거에서 미래에 투자해야 한다.

우리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곳을 들렀다. 몽골인들이 신의(神醫)라고 불렀던 한국인 의사 이태준(1883~1921) 기념공원이다. 몽골 민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이태준 선생은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하고,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눈을 뜬다. 1914년 몽골에 입국,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업하고 몽골인에게 근대 의술을 베풀었다. 당시 중국의 공공연한 비밀작전으로 몽골을 휩쓸던 성병은 몽골의 마지막 황제에까지 옮길 정도이었다.

이태준 기념 공원. 이태준 선생은 몽골 황제의 주치의로 활약하며 1919년에는 최고 훈장을 받고 몽골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계속 했다. [사진=장영주]
이태준 기념 공원. 이태준 선생은 몽골 황제의 주치의로 활약하며 1919년에는 최고 훈장을 받고 몽골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계속 했다. [사진=장영주]

2년 뒤 울란바타르를 점령한 러시아 군대에 의해 38세의 나이에 피살된다. 2001년 7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와 연세의료원의 자금 지원으로 울란바타르에 ‘이태준 기념공원’이 준공되었다. 처음의 지저분하고 어수선했던 공원을 정갈하게 관리하라고 몽골 정부에게 강력하게 건의하여 관철한 이가 바로 ‘ㅂ’님이다.

울란바타르의 항올구 아파트 밀집 지역에는 우리나라 기업 이마트가 3호점을 오픈하려고 한창 공사 중이다. 1호점, 2호점의 2~4배 크기로 현지 대형마트· 하이퍼마켓 중 가장 큰 편이고 이 가운데 30% 가량이 한국 상품이다.

몽골에서 가장 현대적인 상업 화랑을 또다시 방문하였다. 한국의 민화 화가들과 몽골의 젊은 화가들과의 합동전이 열리고 있었다. 30년 전, 목우회(木友會)의 일원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몽골합동전을 개최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당시 주한몽골대사 ‘우루진’ 씨와 몽골 문화 정책 실무자인 ‘마야’씨도 건강하게 잘 계실까? 그때보다는 지금의 몽골 화가들은 당연히 훨씬 현대적이고 세련되어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묻어난다. 최근 한국에서 만났던 몽골화가의 그림도 보고 그들의 친구들을 반갑게 만나 세대를 넘어 진솔한 대화와 몸짓을 나눈다.

예술가는 국적이 있으나 예술은 국경이 없다.
그래서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