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타임즈>에서 선정한 ‘세계를 움직인 가장 역사적인 인물’은?
<포춘>에서 발표한 ‘세계 500대 기업 CEO들이 뽑은 밀레니엄 최고의 리더’는?
<워싱턴 포스트>선정 ‘지난 1000년 동안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은?

‘칭기스 칸’(Chingiz Khan 1162 ~ 1227)이다. 칭기스 칸은 24년 동안 미국 영토의 3배가 넘는 땅을 정복하였다. 로마가 400년에 걸쳐 정복한 땅보다 더 넓은 영토이다. 칭기스 칸과 그 후손이 세운 원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다양한 민족의 집합체이었다. 그러나 칭기스 칸은 가장 잔혹한 정복자로 자신에 맞서 저항하는 자들은 철저하게 말살하였기에 스탈린과 비슷한 4,000만 명의 사람을 죽였다. 당시 세계인구의 11%에 달하고, 인간이 내뿜는 7억 톤의 탄산가스 감소로 기후변화가 초래되었다. 그러나 일단 항복한 자들에게는 너그러이 관용을 베풀어 문화를 융성시킨 공로도 있다. 자신은 문자를 몰랐으나 문자를 만들고 정복지의 고유한 종교, 선진문화와 법 체제를 존중하고 종이, 인쇄, 화약, 총포기술을 보존하고 가장 안전한 사회를 이룩하려고 하였다. “쿠빌라이 치세의 원나라에서는 작은 소녀가 금 한 덩어리를 가지고 국토의 끝에서 끝까지 무사하게 여행할 정도로 치안이 유지되었다.”는 연구도 있어 ‘팍스 몽골리아’를 건립했다는 주장이 있다.

칭기즈 칸의 본명은 ‘테무친’(鐵木眞)으로 아홉 살에 부족장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다른 부족에 의해 독살된다. 두 과부와 열 살이 안 된 자식 일곱 명이 남겨졌으나 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어머니와 동생을 돌보기 위해 테무친은 풀뿌리와 물고기를 먹으며 포로가 되는 극한상황에서도 살아남는다. 17세의 테무친은 아버지와 동맹 관계에 있던 타 지역의 부족장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아버지의 부하들을 다시 모으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믿고 따르던 옹 칸의 배신으로 쫒기다가 불과 19명만이 살아남고 이들은 테무진에게 충성을 서약한다.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으로 몽골의 전통 씨족, 부족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사결사체가 되어 몽골 통일의 기초가 된다. 이후 11개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부족장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몽골 전체의 우두머리인 칸으로 추대된다. 칸이 된 그는 군대 및 정치 조직을 제대로 갖추고 법을 만들었다. 여러 나라를 정복하면서 유능한 인재를 부하로 삼았고 문화와 학문, 기술, 정보를 얻어 대제국의 통치에 활용했다. 전쟁터에서는 병사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천막에서 잠을 자고 병사들이 ‘테무친’이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칭기즈 칸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1204년 몽골 고원 통일, 1206년 서하, 금나라의 정복과 프랑스 인근까지 진출하는 동서양에 걸친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하였다.

세계 최대의 징기스칸 조각상. 사람들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사진=장영주]
세계 최대의 징기스칸 조각상. 사람들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사진=장영주]

당시 몽골의 지배를 철저하게 받았던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몽골인들은 최근 70년간은 칭기스 칸을 말할 수 없었다. 언급하는 순간 감옥행이거나 형벌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제 독립국의 몽골인은 그들의 핏줄 속에 흘러 내려오는 위대한 선조 칭기스 칸을 마음껏 예찬할 수 있게 되었다. 전진 불독(Tsonjin Boldog) 초원의 언덕 위에 건물 높이 10m, 동상의 높이 40m, 총 높이 50m인 세계에서 가장 큰 ‘칭기스 칸의 조각상’을 세웠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스테인리스강으로 조형된 칭기스 칸은 세상을 굽어보면서 지금도 무엇인가를 호령하고 있다.

이런 말이 아닐까?

“내가 만든 법 '예케 자삭(Yeke Jasag)'속에는 만물은 모두 존중해야 한다는 사상과 하늘(Tengri)을 극진하게 모셔야 한다는 마음과 자유무역을 중시한 원대한 뜻이 들어있다. 많은 피를 흘렸지만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누구나 평등하고 누구나 자유롭고 누구나 안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형제가 되어 서로를 사랑하라.”

1206년 44세가 된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 산 근처 오논 강 원류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100만 명 가까운 인구에 2,000만 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보유한 새로운 나라, 큰 몽골 나라인 ‘예케 몽골 울루스’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칭기즈 칸은 부족 간 납치와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고,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으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것을 선언했다. 칭기즈 칸은 몽골인을 넘어 시베리아 부족, 위구르족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여 부족이나 민족 전체 단위로 가족화의 유대정책을 폈다. 1207년~1209년까지 수차례의 공격으로 중원의 일부, 티베트, 내몽골에서 돈황, 난주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한 탕구트(서하, 西夏)를 정복한다.

그가 48세가 되던 1210년, 금나라는 사신을 보내 몽골의 복종을 요구하였으나 칭기즈칸은 땅에 침을 뱉고 오히려 금나라와 전쟁을 선포하였다. 1211년 쿠릴타이를 소집해 원정을 결정하고 진군을 개시한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 수도 중도(中都, 현 베이징)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낸다. 당시 원정에서 몽골군의 병력은 기병 6만5천이었다. 지구력 강한 몽골 말과 보급부대가 따로 필요 없는 간편함과 신속함, 고도로 조직화된 편재인 아르반(10호), 자군(100호), 밍간(1000호), 투멘(1만호)은 몽골군의 기동력을 세계 최강으로 끌어 올렸다. 여기에 포로들을 통해 익힌 공성전(攻城) 전술과 무기, 굳은 충성심과 규율, 적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선전전, 적이 제대로 대응하기 전의 전격기습전, 적의 영토 전역에 걸쳐 양동작전을 펼치는 전술 등으로 승리를 이어갔다.

한편, 칭기즈 칸은 넓어진 영역을 다스리며 교역과 상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한 호라즘(Khorazm)과 교역을 협상하고 친선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호라즘과 맺은 화친은 깨지고 또다시 전쟁이 벌어졌다. 1219년 원정을 떠난 칭기즈 칸은 이듬해 봄 호라즘 영역에 도착하여 그 해가 끝나기 전에 주요 도시를 속속 점령했다.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에 쫓기다가 카스피 해의 작은 섬에서 죽고 그의 아들이 인더스 강변에서 몽골군과 맞서기도 했지만 결국 완패한다.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휩쓴 칭기즈 칸의 원정은 1222년 여름 오늘날의 파키스탄 중심부에서 멈추었다. 다음해 제배와 수부타이가 이끈 별동군이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러시아 남부 지역과 이란 일부 지역의 여러 도시를 공략한다.

본거지로 돌아온 칭기즈 칸은 서하를 재공격하기 위해 고비 사막을 건너던 1226년 겨울, 야생마 사냥 중 낙마하여 크게 다쳤지만 전쟁을 계속했다. 수도를 포위하고 마지막 승리를 앞둔 1227년 8월, 오늘날의 중국 감숙성 청수현 서강 강변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고향으로 돌아와 몽골의 초원 어디엔가 묻혔다.

칭기스 칸은 말한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하오.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소.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소.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