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의 조상은 바로 훈(훈누, 흉노)족이고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우리와도 관계가 있다. 유럽에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에게 같은 시기 한반도에 있었던 신라, 가야, 고구려의 지배계층과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는 논문도 발표되고 있다(백산학회 회보). 훈족은 북방기마 민족의 한 분파로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약 700년간 중원지역을 놓고 중국과 각축을 벌리며 부침을 거듭했다. 이때 훈누에 속해 있던 한민족 원류의 중 일부는 서쪽으로 진출, 훈족으로 커가고, 한 부류는 한반도 남부까지 진출해 현재의 한민족의 일부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스의 지리학자인 스트라보(B.C. 63~AD 23)는 훈족의 주요 활동 위치가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서기 355년부터 10년간 훈족은 카스피 해와 아랄 해 사이의 유목민인 알란족을 공격하는데 《위서(魏書)》에는 흉노족이 ‘엄채’(알란족)를 공격했다고 적고, 로마의 마르셀리누스는 이 사건을 훈족이 저질렀다고 기록했다.

사막의 배 뎀에, 수채화. 장영주 작.
사막의 배 뎀에, 수채화. 장영주 작.

기원전 60년부터 훈족 내부에서는 지도자인 ‘선우(單于)’가 다섯 명이 난립할 정도로 극도로 혼란한 내분이 계속된다. 그중 호한야 선우는 경쟁자인 질지 선우와의 싸움에서 불리해지자 중국 한나라에 복속하여 신하가 되고 유명한 미녀 왕소군의 고사가 탄생한다. B.C. 51년, 호한야가 한나라와 연합하여 질지 선우를 공격하자 질지는 추종자들과 함께 현재의 위구르 자치구 지역으로 퇴각한다. 이로써 훈족은 중국에 복속한 남 훈족과 질지를 따라 서쪽으로 이주한 북 훈족과 완전히 분열된다. 서쪽으로 이주한 질지는 카자흐스탄 남부 등의 많은 부족을 정복하며 세력을 넓혔다. 훈족이 강대해지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던 한나라는 B.C. 36년, 장군 진탕이 7만의 군사를 이끌고 질지를 공격한다. 성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질지를 포함한 북 훈족의 귀족 1,518명이 죽임을 당했다. 살아남은 훈족은 한나라의 영향을 벗어나기 위해 서진하여 ‘카스피 해’와 ‘아랄 해’에 근거지를 만들고 200년 동안 더욱 세력을 키워 나갔다. 동방에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해 온 에프탈족의 압박과 기후변화로 생활여건이 나빠지자 북 훈족은 더욱 먼 서쪽인 유럽으로 대규모 이주를 단행했다.

서기 374년 경, 아시아로부터 유럽에 등장한 낯선 집단인 훈족에 의하여 게르만족(프랑크족, 반달족, 동고트족, 서고트족, 랑고바르드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서로마 지역의 게르만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영토가 게르만족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지중해 지역을 정복했던 로마 군단의 전력은 약화된다. 그러나 변방지역을 계속 지배하기 위해 로마는 게르만족의 용병에 의지한다. 자력으로 거대한 제국을 경영할 힘을 잃어버린 서로마는 설상가상으로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의 침입에 의해 순식간에 멸망한다.

인류사적인 큰 변화의 단초인 ‘게르만 대이동’과 ‘서로마의 몰락’을 제공한 민족이 몽골의 초원으로부터 온 훈족이다. 지금의 헝가리(Hungary)는 ‘훈(Hun)족의 나라’ 라는 뜻이고 몽골 언어의 ‘훙’(Hun)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헝가리와 불가리아의 신생아에게서는 우리처럼 몽골 반점이 있고 발칸 반도는 ‘밝은 칸’의 나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에 의하면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밝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신용하 교수는 훈족의 이동은 고조선 유민들의 서진 때문이라는 더욱 새롭고 과감한 이론을 전개한다.

역사를 찾아 여행을 하다 보면 선조의 발자취를 보게 되고 그들에게서 지금, 여기, 기적같이 존재하는 나를 체득하게 된다.

이 또한 분명 깨달음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