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품은 게르

몽골인의 전통집 게르는 고원의 풍토와 유목생활에 맞춰 이동이 편리하도록 몇 사람이 한 시간 내에 신속하게 조립, 해체가 가능하다. 여름철엔 게르의 흰색이 강렬한 햇빛을 막아 주고, 천막 밑자락을 걷어 통풍과 온도조절을 해결하고 겨울철엔 게르의 원형구조가 강력한 북서풍을 비껴가게 하니 경험에 의한 합리적, 과학적인 설계라 할 수 있다. 게르 안에 있을 때도 늘 밖에 있는 가축 떼의 동정을 파악하고 늑대나 외적의 습격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다.

박인호, 실크로드에서, 파스텔.  평생 화우인 박인호 화백(현 목우회 이사장)의 작품이다. 중국은 물론 실크로드 주변국과 수교가 없던 28년 전에 5년에 걸쳐 일 년에 한 달씩을 실크로드를 따라 그림투어를 할 때 현장에서 그들의 생활과 함께 한 귀한 작품이다. 그러기에 예술은 정치보다 근원적이고 영원하다. [사진=장영주]
박인호, 실크로드에서, 파스텔. 평생 화우인 박인호 화백(현 목우회 이사장)의 작품이다. 중국은 물론 실크로드 주변국과 수교가 없던 28년 전에 5년에 걸쳐 일 년에 한 달씩을 실크로드를 따라 그림투어를 할 때 현장에서 그들의 생활과 함께 한 귀한 작품이다. 그러기에 예술은 정치보다 근원적이고 영원하다. [사진=장영주]

게르는 크게 나무골조와 흰 펠트덮개로 나뉘고 나무골조는 한(벽), 우니(기둥), 터너(연기 배출구), 바간(지지대)으로 구성되어 있다. 벽의 수와 나무 막대기는 게르의 크기에 따라 다르나 유목민의 게르는 5~9개의 벽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의 크기는 16~18㎡이다. 게르 안은 세 곳으로 나뉘는데 문 안을 향해 왼쪽(서쪽)은 남성 구역으로 이곳에는 안장, 고삐, 아이락 통을 보관한다. 오른쪽(동쪽)은 여성 구역으로 여주인과 애들의 물품, 부엌 세간사리, 살림도구 등이 있다. 남성 구역은 신이 보호하고 여성 구역은 태양이 보호한다고 믿고 가장 거룩한 곳은 문 맞은쪽의 북쪽 벽인 ‘허이머르’ 구역이다. 이곳에는 주인의 개인무기, 몽골의 현악기인 집주인의 머린호르(마두금), 집주인 말의 고삐 등 그 집주인이 아끼는 물건을 보관한다. 주인은 항상 문 쪽을 향해 왼쪽, 손님은 오른쪽에 앉는다. 여자는 난로 옆, 아이들은 그 곁에 앉고 주인과 부인의 침대는 여성 구역에 있다. 손님의 침대는 반대편이며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발아래에서 잔다. 게르 중앙에는 몽골인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주흐’(난로)가 있다. 따뜻하게 하는 목적 외에도 주흐는 조상과의 유대를 상징한다. 몽골의 겨울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함 자체이므로 난로의 불을 지키는 게 곧 가정의 생존과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칭기즈칸 때의 법령에는 재에 오줌을 누지 말라는 조항이 있었을 정도로 불을 신성시 했고 지금도 게르 안의 화덕을 넘어 다니거나 물을 붓지 않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

게르는 중국에서는 ‘파오’(包), 실크로드의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등지에서는 고향이라는 뜻의 ‘유르타’라고 하고 아랍어로도 ‘알-유르트’라고 한다. 몽골인은 한때 자신들이 정복했던 땅의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카자흐스탄, 카르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사람들은 별로 존중하지 않는 듯하였다. 그들은 대개 음식을 손으로 먹는데 몽골이 정복한 뒤로 칼의 사용을 금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림, 박인호 작, 실크로드에서, 파스텔

이 그림은 평생 화우인 ‘박인호 화백’(현 목우회 이사장)의 작품이다. 중국은 물론 실크로드 주변국과 수교가 없던 28년 전에 5년에 걸쳐 일 년에 한 달을 실크로드를 따라 그림투어를 할 때 현장에서 그들의 생활과 함께 한 귀한 작품이다. 그러기에 예술은 정치보다 근원적이고 영원하다.

게르의 철학

게르는 수 십 채가 있어도 모두 같은 방향으로 세워진다. 유목 생활을 통한 전통적인 주거문화가 방향에 따라 엄격하게 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르의 연기배출구인 터너, 기둥인 바간의 배치와 기능과 특징은 몽골인의 세계관이 느껴진다.

게르에 누워 하늘을 보면 둥근 터너 하나가 동서남북을 의미하듯 사등분 되고 그 밖으로는 더 작게 8등분 되어 하늘이 사통팔달로 확산되고 수렴되는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빛이 통과하는 유일한 창이 터너이고 기둥인 바간은 게르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므로 바간을 만지거나 기대는 것을 금한다. 두 개의 바간과 연통 하나, 모두 새 개의 수직 구조물이 하늘을 떠받드는 솟대처럼 게르 내부에 솟아 있다. 그들은 하늘과의 연결통로인 바간을 통해서 과거, 현재, 미래를 지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도 우리처럼 삼(三)이라는 숫자를 퍽이나 좋아 하는 것 같다. 바람이 심하게 불 때는 게르가 안전하도록 펠트 둘레에 로프로 단단히 묶고 무거운 돌을 줄에 매달아 땅에 늘어뜨린다. 비가 오면 터너 구멍을 덮고 더우면 여는데 여자아이들도 능숙하게 벽을 타고 게르 꼭대기까지 오르내린다.

초원의 게르. [사진=장영주]
초원의 게르. [사진=장영주]

 

그들은 징키스칸의 정복전쟁으로 세계 최대 최강의 대제국 원나라를 세웠으나 유목민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하여 게르 생활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였다. 칸들은 원정 중에도 소가 끄는 수레 위에 큰 게르를 얹어 몰고 다녔다. 징키스칸의 손자인 원(元) 세조 쿠빌라이는 수도인 대도(大都)와 여름 궁전 상도(上都)에 호화로운 궁궐을 짓고 낮에는 궁에서 정사를 보고 밤이면 칸의 게르인 ‘오르도’(Ordo)에서 잠을 잤다. 차츰 대륙의 풍요한 농경정착민의 문화에 적응하여 주택에 살게 되면서 말 타기를 게을리 하고, 풍족하게 먹고 마시면서, 살이 찌고 체력이 저하되었다. 그 결과, 적은 수의 몽골인으로 수많은 지나(支那)의 백성을 통치해야 하는 긴장감을 잃고 정무를 게을리 하여 결국 대제국은 빠르게 소멸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게르를 중국의 자치구인 (내)몽골인들에서는 ‘파오’(包)라고 한다. 그러나 독립국인 (외)몽골인들은 ‘게르’를 ‘파오’라고 하면 몹시 기분 나빠하는데 내몽골과의 오랜 반목의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 같아선 독립국인 약 3백만 명의 외몽골과 약 6백만 명에 달하는 중국자치령인 내몽골이 쉽게 통일될 것 같지는 않다.

몽골의 현대식 아파트는 1960년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까지 몽골인의 반 이상은 게르 안에서 생활을 한다. 도시의 단독 주택 마당에는 대개 게르가 따로 있어 그들의 게르에 대한 향수를 알 수 있다. 울란바타르 등 큰 도시는 중국 건축회사들이 서민 아파트를 짓고 가끔은 일본 건축회사가 고급 아파트를 짓기도 한다. 두 나라의 솜씨는 겉으로 보기에도 확연하게 다를 정도로 차이가 난다. 우리가 잘하는 아파트 건축을 몽골에서 시도해 봄직도 한데 큰 상가를 세우기는 하지만 아직 한국건설업체가 지은 일반 아파트는 없는 듯하다.

대부분의 관광용 게르 캠프 화장실은 나름 수세식 변기와 화장지가 준비 되어 있지만 게르의 임대료에 따라 열악한 곳도 있다. 초원의 유목민들은 화장실이 따로 없고 용변 보러 간다는 말을 "말보러 간다."고도 한다. "큰 말 보러 간다."라는 말도 있다니 무슨 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