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바타 씨

몽골인은 러시아, 중국, 일본산보다 ‘설렁거스’라고 부르는 한국제품을 가장 좋아한다. 심지어는 경찰의 복장과 경광등까지도 우리와 똑같아 마치 한국에 온 듯 착각할 정도이다. 왜 그렇게 한국 것을 좋아 하냐고 하니까, “ㅂ”님이 그 속내를 말한다. “다른 나라 것을 베끼는 것보다 한국 것을 베끼면 쪽 팔리지 않기 때문”이란다. 형제의 나라 설렁거스의 것이므로 하나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설렁거스는 옛날 고려신부를 맞이한 몽골황제가 색동옷을 입은 신부를 보고 “설렁거(무지개)처럼 아름답다.”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우리의 가이드 겸 운전을 맡은 40세의 몽골사내 '바트냠(Batnyam)'씨와 함께 고비사막으로 떠난다. 그는 자기를 ‘바타’라고 쉽게 부르라고 한다. ‘영웅- 바타’ 씨는 선이 굵으면서도 재치가 풍부한 몽골의 유쾌한 사내이다. 마침 고비사막 출신이기에 망망한 사막 가운데서도 길을 찾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5남1녀 중 셋째인 그는 몽골 국립 경찰대학교 출신의 엘리트로 8년간 현직에 근무했다. 결혼 후 경찰 월급이 적어 사직하고 4년여를 한국에서 돈벌이를 했기에 우리말을 꽤 잘하고 간단한 문자도 주고받을 수 있다. 마침 여행 중에 계속 경찰로 남아 있던 그의 절친 선배가 울란바타르 경찰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며 막 받은 문자를 보여 준다. 임기응변에 기민하고 배짱과 감성도 풍부한 사나이 바타 씨이기에 계속 경찰에 남았더라면 그도 분명 고위직이 되었을 것이다.

바타의 초상, 수채화. 장영주 작.
바타의 초상, 수채화. 장영주 작.

큰아버지뻘인 우리에게 어느새 말끝마다 ‘형’이라고 부르는 살가운 행동거지가 밉지 않다. 우리도 자연히 “Mr 바타” 가 아니라 “바타야!” 라고 부르면서 친해졌다. 바타 아우는 한국에서 40가지 이상의 직업을 해 보았다고 한다. 처음 1년간은 안산 남의 집 옥상(옥탑 방이 아님)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종이 박스를 깔고 자면서 직장에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사장은 도주하고 1년 치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는 말에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울 뿐이었다. 많은 고생을 겪던 중에 결국 친절한 분들을 만나서 일이 잘 풀렸다면서 한국에 관한 것은 모두 좋아한다. 미안한 마음에 에너지를 담아 얼굴을 그려주었더니 말 그림도 한 장 더 달라고 떼를 쓴다.

바타의 열 살 연하 부인 '벌럴토아'(Bolortuya)님은 동몽골의 지체 높은 가문의 출신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국제 아동 학력 경연대회’에 선발되어 독일, 미국 등을 다녀왔고 일본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재원이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려고 친정에서 쉬고 있다고 한다. 이것만 봐도 바타 아우의 넉살과 후리는 솜씨를 알만하다.

여하튼 유쾌한 바타 덕분에 많이 웃고 더욱 생생한 현장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내 티셔츠를 주었더니 덥석 받아들고 기뻐한다. 틈틈이 고비에 사는 막내 동생과 바로 아랫동생도 불러 인사를 시킨다. 모두 몸이 큰 사내들로 사업을 일구어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서른 살 막내 동생 ‘아리옹벌드(Ariunbold)’는 185센티의 키에 사천왕 같은 풍모이지만 철봉에서 100번 이상 회전하는 체력과 운동신경의 소유자였다. 그에게도 얼굴을 한 장 그려 선물하였다. ‘이 그림에는 소원성취의 에너지가 있으니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라고 말하며 건네주니 씩 웃는 모습이 아기 같이 순진하다. 형의 말에 절대 복종하고 따르는 것이 몽골의 가족 문화이다. 나이와 국경을 넘어 진정한 형제애가 느껴지는 사내, 우리의 동생 ‘바타’와 오래 헤어졌던 가족처럼 가까워진다.

“바타야! 아내의 예쁜 딸 순산을 기원하고 시간이 나면 함께 한국으로 놀러 오거라. 이번에는 형들이 차를 몰아 네가 좋아하는 한국을 안내하마.”

완전 꼴찌의 행복

아침을 뜨자마자 곧 열린얌으로 내달린다. 200km로 약 4시간 소요될 것이다. 가끔 돌무더기를 쌓아 올린 우리의 ‘서낭당(성황당)’ 같은 어버(Оvоо)를 지난다. 어버는 흉노(凶奴)족 시대부터 공물을 올리거나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되었으며 반드시 오른쪽으로 세 바퀴를 돌면서 축원을 비는 신령스러운 곳이다. 몽골인의 선조는 초원을 지배하던 ‘흉노족’이라고 볼 수 있다. 흉노라는 명칭은 ‘흉악한 노비’라는 중국인 특유의 모욕적인 말로 서로 오랫동안 싸워 온 적개심이 묻어있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성장한 세력으로 진나라 말에는 선우(單于)의 영도로 부족 연합체의 국가체제를 이뤄 북방초원 전역을 지배했다. 세계사에서는 게르만의 대이동을 촉발한 민족이기도 하다. 원래 발음은 ‘훈(HUN)’ 또는 ‘훈누(HUNNU)’로 몽골인은 사람을 ‘훈’이라고 한다. 예를 들자면 한국인을 '설렁거 훈’이라고 하는 식이다. '훈(HUN)'과 '한(HAN))'은 비슷한 발음이고 우리는 스스로 '한민족'이라고 하니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나담 축제의 기원은 훈누족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몽골 혁명 기념일인 매년 7월 11일~13일까지 울란바타르에서 개최되는 몽골의 대표적인 민속, 스포츠 축제이다. 정식 명칭은 ‘에링 고르붕 나담’으로 남자의 세 가지 경기인 몽골 씨름, 말타기, 활쏘기 경기를 한다. 각 부족을 대표하여 몽골 전국에서 모여든 선수들이 각축을 벌이는데 유목민의 필수 생존 기술이며 각 부족의 힘을 과시하는 군사 훈련이기도 했다.

나담은 몽골 기마병과 전통 복식을 갖춰 입은 주민의 행진으로 시작된다. 선수들의 열띤 경기 외에 전통 음악 공연, 음식, 공예품 판매도 함께 하는 스포츠 제전이다. 남자들의 경기라지만 여자들은 물론 아이부터 노인까지 즐기며 정치로 보면 국민이 단결하는 축제이다. 세계인의 축제로 커가고 있어 그 기간에는 호텔 잡기가 어렵다.

세 가지 경기 중 몽골 최고의 인기남이 탄생하는 씨름 '부흐'(bukh)는 상대를 바닥에 쓰러뜨려 팔꿈치나 무릎 또는 다른 신체 부위를 바닥에 닿게 하면 이긴다. 토너먼트로 빠르게 진행되고 승자는 패자의 엉덩이를 툭 치고 독수리 춤을 춘다. 주민이 좀 있다 싶은 마을마다 둥근 체육관이 있는데 어김없이 모두 씨름장이다. 나담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말타기(Morinii Uraldaan)는 300~500마리의 말이 동시에 출발하는 장관을 이룬다. 전국 각지에서 가장 좋은 말이 모인 경주에서 우승한 말에게는 가장 강한 말 ‘툼니 에흐'라는 칭호가 수여되며, 꼴찌 말에게는 ‘부렌 자르갈' 곧 완전한 행복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완전하고도 행복한 꼴찌’라니!

일등이든 꼴찌든 말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초원 유목민들의 마음이 듬뿍 느껴진다. 군사 목적이 분명한 활쏘기(Sur Harvaa) 시합은 '큰 활'과 '작은 활'의 두 부문으로 나누어 치른다. 남성은 과녁으로부터 75m, 여성은 65m 거리에서 각 40발의 화살을 쏘며 과녁에 가장 많이 맞힌 사람이 이긴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우리에게서도 나담 축제가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고려의 팔관회처럼 추수가 끝나고 모두 모여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씨름과 무예를 겨루며 사흘 밤낮을 상하가 어울려 술 마시고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상하가 유별하니 계급에 따라 듣는 음악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 중국인 공자의 유교 사상이다. 그러나 영고와 동맹은 음주가무, 예악으로 상하가 어울려 신명나게 하나 되는 넓디넓은 초원의 마음이고 자유로움이 아닌가. 아~! 옛날이여.

마음을 저미는 가수 송가인의 트롯, 세계를 휩쓰는 싸이, 방탄소년단, k-드라마 등등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 진 것이 아니다.

안심하라. 기뻐하라. 비추어라. 자유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