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말

우리의 소중에서 누렁소는 몽골이 원조라고 한다. 몽골 초원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검은 소와 검은 세로줄 무늬가 있는 칡소도 가끔 보인다. 소를 좋아 하는 ‘ㅎ’님이 소의 순수한 원형을 볼 수 있다고 놀라워하며 자주 차를 세우고 촬영한다. 염소는 우리네보다 훨씬 커서 마치 당나귀로 착각할 때가 있다. 양 무리에는 염소를 같이 두는데 양은 집을 못 찾아오지만 염소는 찾아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은 풀의 잎파리만 먹지만 염소는 뿌리까지 파먹기 때문에 염소만 기르면 흙이 드러난다고 한다. 오랜 가뭄 끝에 초원에 비가 내리면 양들이 좋아서 춤을 춘다고 한다. 물론 유목민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겠지만. 그들이 가장 많이 먹는 고기는 양고기이고 소고기는 좀 더 귀하게 여긴다.

몽골말은 중앙아시아의 야생마 ‘프셰발스키 말’의 후손으로 몽골인에게 말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다. 식량이며 이동수단이고 전장에서는 든든한 아군이다. 나담 축제 기간의 말달리기 경주는 기수가 아닌 말이 주인공이 된다. 사람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 우승마는 머리 갈기와 꼬리를 특별한 헤어스타일로 묶어 주는데, 이때 그 말은 몹시 뽐내고 주변의 말들은 시샘한다고 한다. 사람과 똑 같다.

초원의 말, 수채. 장영주 작.
초원의 말, 수채. 장영주 작.

서구인이 힘센 종마를 선호한 것에 비해 몽골인은 유순하고 지구력이 좋은 거세마나 말 젖이 나오는 암말을 선호하였다. 우리나라 제주마의 발에서 어깨까지 평균 길이는 115~117cm, 몽골말은 120~140cm, 서구의 종마는 150~160cm이다. 몽골말이 체격은 작은 편이지만 체력은 뛰어나다. 서구의 큰 말은 전속력으로 3km 이상은 달리지 못하지만 몽골말은 30km를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고 힘이 다하면 쓰러져 죽는다. 근접전투시 큰 말보다 회전 반경이 작아 전투병이 민첩하게 연속공격을 할 수 있다. 또 몽골말은 반동이 적어서 빨리 뛰더라도 피로를 주지 않고 몽골병의 특기인 달리는 말위에서의 연속사격이나 뒤돌아 쏘기가 가능하다. 또 영리하여 주인의 의도를 잘 따르기에 숨거나 은폐하기에도 편리하다. 서구의 마구간에 넣어 기르는 말과는 달리 날씨가 거친 야생에서도 생존할 뿐만 아니라 새끼를 치며 잘 살아간다.

몽골군의 세계 제패 첫 번째 전략은 속도였다. 정탐병으로부터 몽골군이 삼사일 뒤에 도착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부랴부랴 전투 준비를 시작하면 다음날 새벽, 이미 몽골의 기마병에게 포위되어 항복이냐, 항전이냐를 선택해야 한다. 몽골의 승리에는 끈질기고 영리하고 순종적인 몽골말이 있고 그 말을 자유자재로 몰고 다닐 수 있는 몽골군의 기마술과 어떤 자세에서도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궁술이 있었다. 몽골 병사는 늘 2, 3 마리에서 6, 7 마리까지 말을 데리고 다니며 전장에서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항상 최고 상태에 있는 말을 탈 수 있었다. 말을 관리하는 부대는 마초를 확보하기 위해서 어두워지기 전에 가장 먼저 숙영텐트를 친다. 허지만 비상시를 대비해 모든 병사는 잘 때에도 2필 정도의 말을 자신의 곁에 둔다.

전투에 나가기 전, 여름부터 소고기와 말고기를 찢어 강한 햇빛 아래 육포 ‘보르츠’로 만들어 가루로 빻아 두 개의 가죽주머니에 넣어 말등에 달아둔다. 한 자루가 한 달 치니 두 달 치의 전투식량이다. 만약 병사가 행군이나 전투 중에 본진에서 낙오하더라도 두 달 안에는 본대로 합류하라는 것이다. 그 안에 귀대하지 못하면 몽골전사가 아니니 버리고 간다는 무언의 약속이다.

평생을 말등에서 살아온 몽골인에게 말은 가축 이상의 존재이었다. 기마 전쟁이 사라진 지금도 몽골에서는 주인이 있는 모든 말은 즉시 승마가 가능하다.

 

제주말

몽골인들은 ‘말’을 ‘멀’이라고 부르는데 ‘몰’이라고도 들린다. 제주도에서도 ‘몰’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제주 말들은 석기시대부터 제주도에서 사육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는 탐라(제주)에서 고려에 예물로 말을 바친 기록이 있다. 1273년, 원나라의 탐라 침공 뒤 약 백여 년간은 수십만 두의 몽골말이 제주에 유입되었다. 그 뒤 제주마는 북방계 우량마와 혼혈되어 제주의 풍토에 적응된다.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는 『탐라 기행』에서 “쿠빌라이가 제주도에 파견한 몽골기병은 천 칠백 명으로 원나라가 망한 뒤 일부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나머지는 제주도에 남아 토착화하였다.”’고 적었다. 제주마의 털색은 밤색ㆍ적갈색ㆍ회색ㆍ흑색ㆍ담황색ㆍ얼룩색 등이 있다. 비교적 작은 체구에 가슴둘레와 몸은 길고 폭은 좁아 수레를 끄는 데 가장 알맞은 체형이다. 힘을 쓰는 가축으로서 농경문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때는 2만여 두를 사육했으나 천여 두로 감소하여 198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푸른 초원 위에 말들이 뛰어다니는 풍경은 그림 같지만 근세조선의 제주 사람들이 귤과 말 때문에 겪어야 했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모두 잦은 공출과 과도한 세금 때문이었다. 숙종 때의 이형상 제주목사의 장계에 의하면 제주 말을 키우는 사람에 대한 가렴주구에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다.

제주에서, 유화. 장영주 작.
제주에서, 유화. 장영주 작.

“한 사람에게 1년에 징수하는 것은 혹 말 10여 마리에 이릅니다. 이것은 다른 도의 목장에는 없는 역입니다. 그러니 매우 가난한 백성이 변통하여 마련해 낼 것이 없어서 끝내 부모를 팔고 아내와 자식을 팔고 자기 몸의 품을 파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풍속이 있겠습니까?[....]조사해보니 부모를 판 사람이 5명, 아내와 자식을 판 사람이 8명, 자신이 머슴살이가 된 사람이 19명, 동생을 판 사람이 26명이어서 모두 합쳐 58명이나 되었습니다.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어리석은 백성의 풍속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만만의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말은 제주도 사람들에게 도움과 재앙을 함께 주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제주도 말은 평상시에도 필요했지만 전쟁터에서 더 요긴 했다.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패전 이전에는 신립 장군은 여진족 같은 북방 기마족을 제압하던 조선의 뛰어난 기마부대의 장수였다. 의병장으로 순국한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 역시 의병으로 전사하였다. 그가 제주군마를 모집할 때 지은 글이 뛰어나다 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암송되었다.

“소매를 떨치고 일어날 사람이 바다 밖(제주)에도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네.
채찍을 손에 들고 임하였으니
천하에 말(馬)이 없다고 말하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