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독립운동사 중 가장 빛나는 대첩인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역사를 찾아갔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긴 제국주의 일본군에 대항해서 나라 잃고 군대도 없는 우리 독립군이 승리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홍범도나 김좌진 등 한두 명의 지휘관으로 이야기될 수 없는 것으로 그들이 소속 되었던 대한독립군과 북로군정서라는 조직을 알아야 이해가 될 것이다.

북로군정서 터.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북로군정서 터.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답사의 첫 일정으로 찾아간 곳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북로군정서 사관양성소 터인 왕청현 서대파 일대이다. 북로군정서는 대종교 지도자인 백포 서일이 총재를 맡고 있으면서 김좌진을 북로군정서 사관양성소 사령관으로 초빙하여 군사를 양성하도록 했다. 백포 서일은 모금한 군자금으로 체코군의 무기를 구입하여 항일전쟁에 대비했다. 특히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북로군정서 조직 가운데 경신국의 존재이다. 경신국은 지역주민들과의 네트워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일본군의 움직임, 마을의 변화, 밀정의 활동 등을 북로군정서에 전해주는 한인들이 조직되어 있었다. 이렇게 우호적인 지역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들은 훈련에 매진하고 논밭을 일구어 주둔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전투는 군사훈련, 체력훈련만 하면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식민지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끝까지 신념을 지키고 전투에 임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정신무장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 북로군정서에는 기도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북로군정서를 이끌었던 총재인 백포 서일부터 김좌진을 비롯한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대종교인이라는 것을 알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무력과 정신력이 모두 준비된 북로군정서였기에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서간도 지역 신흥무관학교 터인 통화현 합니하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 북간도 지역 북로군정서 터에서도 진한 감동이 느껴졌다. 그동안 우리는 신흥무관학교, 청산리전투를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현장을 보니 그 깊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 독립투쟁을 준비하며 반짝였을 그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논과 밭을 일구며 학교와 건물들을 세우고 무기를 운반하고 기약할 수 없는 세월을 준비했을 이름 없는 만주의 수많은 동포들. 그들의 의로운 마음과 뜨거운 열정과 눈물의 결정체가 바로 청산리전투이며 봉오동 전투였던 것이다.

대종교 영안총본사 터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끊이지 않는 의문이 떠올랐다. 사람은 누구나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이 깊은 산 속에 들어와서 독립운동에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는지 그 밑바탕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들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니 활동중심지인 대종교 총본사 터에 빨리 가보고 싶어졌다.

발해의 궁성터.  대종교는 총본사를 밀산현 당벽진에서  영안현 동경성으로 옮겨 왕성한 활동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발해의 궁성터. 대종교는 총본사를 밀산현 당벽진에서 영안현 동경성으로 옮겨 왕성한 활동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도착한 곳은 발해의 수도 상경성이 있던 곳으로 대종교는 총본사를 밀산현 당벽진에서 이곳 영안현 동경성으로 옮겨 왕성한 활동을 했다. 버스에서 내려 발해의 궁성터를 둘러보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전체 둘레가 17킬로미터라고 하니 지금의 서울성곽 둘레와 비슷한 규모의 평지에 외성을 쌓고 그 안에 성과 절을 짓고 주작대로를 만든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우연이었을까.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성터에서 우리민족의 독립을 꿈꾸었던 독립운동가들. 화려한 꽃들과 중국인들이 보수한 느낌이 드는 성돌 사이를 걸어 끝에 닿으면 그곳 너머가 안희제의 발해농장 수로가 있는 곳이다.

독립투사 안희제의 발해농장.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며 큰 부를 축적한 안희제는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제공하고 이곳 만주 땅에 농토를 개간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독립투사 안희제의 발해농장.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며 큰 부를 축적한 안희제는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제공하고 이곳 만주 땅에 농토를 개간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흑백사진 속 발해농장의 수로가 눈부신 햇살 아래 내 눈앞에 나타나니 감동이 밀려왔다. 어디선가 안희제 선생이 사진에서처럼 앉아 우리를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일본군과의 전쟁만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한인 이주민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무상 분배의 자작농을 육성하고자 했던 그 정신이 놀라웠다. 그렇게 독립운동기지를 준비하던 중 대종교 최대의 탄압사건인 임오교변이 일어나 액하 감옥에서 고문을 받아 순국하셨다.

발해농장에서 한 시간 반쯤 버스를 달려 가슴 아픈 임오교변의 현장인 액하 감옥을 찾아갔다. 액하 감옥 터 주변이 많이 변해서 마을에 계신 할머니 두 분께 길을 물어보니 직접 버스를 안내하고 감옥 설명까지 해주셨다.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액하 감옥에 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물고문을 많이 했으며 그 자리에 세워진 큰 전기회사 건물에서는 지금도 귀신이 나온다는 말을 전한다.

액하감옥. 일제가 일으킨 대종교 최대의 탄압사건인 임오교변으로 많은 대종교인이 액하 감옥에서 고문을 받아 순국하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액하감옥. 일제가 일으킨 대종교 최대의 탄압사건인 임오교변으로 많은 대종교인이 액하 감옥에서 고문을 받아 순국하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십여 년 전까지도 중국인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했었다고 하는데 담벼락 위의 전기철조망이 그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일제는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로 변절하는 40년대에도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는 대종교인들을 이곳 액하 감옥에 가두었다. 대종교인 25명이 갇혀 잔혹한 고문과 사형집행으로 안희제를 포함한 10명이 숨졌다. 이렇게 대종교의 독립운동은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45년 해방으로 액하 감옥에서 풀려난 윤세복 등 대종교인들은 또다시 동경성에 학교를 세우고 한글교육을 한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강형권 선생이 자전거 하나를 타고 발해농장과 영안총본사와 액하 감옥을 누비며 독립운동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남겨진 역사를 오늘 우리가 또 기억하고 기록하며 다시 일어선다.

액하감옥 인근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 두 분으로부터 액하감옥에 관한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액하감옥 인근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 두 분으로부터 액하감옥에 관한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독립운동에서 종교마다, 신분마다, 지역마다 다른 방법을 외칠 때 그 모든 차이점에도 오직 하나 거부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모두 같은 민족인 단군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던 홍암 나철. 자칫 민족주의는 국수주의로 변질될 위험이 있지만 단군의 정신은 홍익인간 정신이기에 자민족중심주의가 아닌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지향할 수 있는 인류보편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많은 독립운동가가 단군을 중심으로 하여 민족정신을 지키며 끝까지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주변국들의 도전으로 우리나라는 해쳐나가야 할 난관들이 산재해 있다. 이러한 때에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심을 되새겨 홍익정신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서는 한민족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