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를 만나러 용정으로 향한다. 윤동주생가를 가는 길에 용정에서 태어난 또 한명의 인물 한낙연을 기념하는 낙연공원에 들렀다. 조남호 교수의 해설이 있기 전까지 일행 중 누구도 한낙연이라는 분을 알지 못했다.

한낙연공원. 한낙연은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화가이자 항일혁명가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한낙연공원. 한낙연은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화가이자 항일혁명가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1919년 3.1운동 당시 이곳 용정에서도 3월 13일 3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때 한낙연은 시위에 쓰일 현수막을 제작하는 등 만세시위에 앞장섰다가 일본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고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는 영국, 프랑스의 조계지로 서양문물이 들어오며 혁명가, 상인, 예술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천부적인 미술재능을 인정받아 오전에는 미술대학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항일활동을 이어갔다.

1923년에 조선인 최초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투철한 혁명정신과 탁월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중국 동북지역 공산당 조직 설립에 앞장서는 동시에 미술전시회를 열고 미술학교를 설립하여 근대 미술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또한 생애 후반기에는 돈황과 키질의 벽화연구를 통해 고고학자로도 활약하다가 1947년 49세의 나이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한낙연공원.  한낙연은 독립운동가, 혁명가, 공산주의자, 화가, 고고학자.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큰 족적을 남겼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한낙연공원. 한낙연은 독립운동가, 혁명가, 공산주의자, 화가, 고고학자.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큰 족적을 남겼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독립운동가, 혁명가, 공산주의자, 화가, 고고학자.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 있었다니!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는지 그것이 더욱 놀랍다. 물론 공산당 활동경력 때문이리라. 아직도 많은 독립운동가가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쳤건만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이제는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그들의 생애와 활동을 알려 나가야할 것이다.

15만원 탈취사건유적비에도 잠시 들렀다. 국민회 소속 단원 6명이 일본돈 15만원, 지금 돈으로 약 230억에 해당되는 돈을 은행수송 중에 탈취하였다. 독립운동에 사용할 무기를 구매하려던 중 밀정에 의해 실패하고 체포된 3명은 형무소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이다. 무장독립단체와 연결되지 않은 의거로 그 한계를 드러내었지만 독립을 위해 얼마나 다양한 활동들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15만원 탈취사건유적비. 국민회 소속 단원 6명이 일본돈 15만원, 지금 돈으로 약 230억에 해당되는 돈을 은행수송 중에 탈취하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15만원 탈취사건유적비. 국민회 소속 단원 6명이 일본돈 15만원, 지금 돈으로 약 230억에 해당되는 돈을 은행수송 중에 탈취하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제목만으로도 아련해지는 윤동주를 만나러 갔다. 그를 키워낸 명동학교 건물이 100년 전 흑백사진 속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맨 처음 보이는 것은 명동학교의 교가였다.

‘흰뫼가 우뚝코 은택이 호대한/한배검이 깃치신 이 터에/그 씨와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나의 명동’

여기에서 흰뫼는 백두산을, 한배검은 단군왕검을 이르는 말이다. 기독교계열의 명동학교이지만 이 교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의식이 바탕에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명동학교는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이 헤이그 특사 파견과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게 되자 이를 계승해 세운 민족학교이기 때문이다. 명동학교에 꾸며놓은 교실에는 윤동주 마네킹이 있다. 그가 펼친 책은 문학 관련 책이 아니라 이상설 편저의 ‘산술신서’ 수학교과서이다. 얌전한 문학소년의 이미지가 강한 윤동주이지만 수학, 특히 기하학을 좋아했고 축구도 좋아했다.

명동학교.  운동주를 키워낸 명동학교 건물이 100년 전 흑백사진 속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맨 처음 보이는 것은 명동학교의 교가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명동학교. 운동주를 키워낸 명동학교 건물이 100년 전 흑백사진 속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맨 처음 보이는 것은 명동학교의 교가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이상설은 근대수학교육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수학, 과학, 법학 등 다방면에 걸친 저서를 남기고 성균관 교수로 동서양의 선진학문에 통달했고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된 이상설은 이후 대종교 북도본사 책임자로 항일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민족운동가인 이상설의 뜻이 이어진 곳이 바로 이곳 명동학교인 것이다.

윤동주 시인 모형. 명동학교 교실에는 윤동주 마네킹이 있다. 그가 펼치고 있는 책은 문학 관련 책이 아니라 이상설 편저의 ‘산술신서’ 수학교과서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윤동주 시인 모형. 명동학교 교실에는 윤동주 마네킹이 있다. 그가 펼치고 있는 책은 문학 관련 책이 아니라 이상설 편저의 ‘산술신서’ 수학교과서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명동학교 뒤편에 윤동주 생가가 있다. 입구에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새겨있는 글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다. 물론 용정이 현재는 중국 땅인 것도 사실이고 조선족이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워낙 우리가 사랑하는 시인이라 빼앗길 수 없는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중국이라는 단어가 기괴한 느낌마저 든다.

생가에 들어서면 ‘김약연목사 기념비’가 서있다. 김약연은 북간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의 개척자이며 지도자이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유언을 묻는 말에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묵직한 말을 남겼다. 그가 바로 윤동주의 외삼촌이다. 기와집으로 된 생가를 보니 그가 명동촌 제일의 부자 윤하현의 친손자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운동주 생가 우물.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운동주 생가 우물.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윤동주는 시기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에 태어나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1945년에 사망했다. 공간으로는 북간도-서울-교토로 이어지는 동북아 격전의 장소에서 살다갔다. 그 격동의 시공간을 순수한 영혼으로 살아낼 수 있었던 윤동주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은 아마도 북간도와 명동촌이라는 낯선 땅을 개척한 증조부와 조부의 도전정신, 해달별을 자식들의 아명으로 지었던 아버지의 문학성, 독립운동가인 외삼촌 김약연의 정신, 민족교육의 산실 명동학교, 그리고 함께 자란 사촌 송몽규, 친구 문익환 등 이곳 북간도 명동촌에서 받은 풍요로운 경험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한 인물이 있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는지. 우리의 선택과 행위가 언젠가 그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어 이 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생각에 순간마다 깨어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용정 지명 기원지 우물비를 보며 이 땅을 처음 개척했던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을 상상해보니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이 지역을 잘 일구어 그것을 기념하는 비가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우리 조상들의 강인함과 개척정신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중국에서 바라본 두만강. 강이 깊지 않아 1990년대 후반 북한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굶주린 북한주민이 이곳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해 왔다고 한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중국에서 바라본 두만강. 강이 깊지 않아 1990년대 후반 북한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굶주린 북한주민이 이곳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해 왔다고 한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용정 일본총영사터를 거쳐 도문 두만강 나루터에 도착했다. 어제 본 압록강보다 더 가까이 북한을 볼 수 있었다. 비가 와서 물살이 거셌지만 평소에는 압록강보다 얕아서 1990년대 후반 북한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굶주린 북한주민이 이곳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해 왔다고 한다. 두만강에서 나오는 길 언덕 위에는 당시에 탈북민을 위한 수용소 건물이 아직 남아있었다. 같은 민족이 그렇게 비참한 지경에 처해있었다니 정말 가슴 아팠다. 이념이나 정치적 이익을 말하기 이전에 민족애, 인류애로 그들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이곳 현장에 오니 저절로 들었다.

숙소로 오는 길에 연변민족박물관을 제대로 못 본 아쉬움도 달랠 겸 연변대학 교정을 돌아보았다. 1949년 동북지역 조선족을 위해 주덕해가 설립한 종합대학으로 조선어와 중국어를 함께 사용하는 유일한 대학이다. 작년 중국 대학순위에서 100위 안에 들며 동북지역 명문대학으로 성장하고 있다. 조선족이 중국내에서 인정받으며 기반을 잡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대학에서 인재를 길러내고 관리로 중국의 중심무대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곳 연변대학에 조선족 출신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부모들이 한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가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일이 많다보니 경쟁률 높은 연변대학에 한족 출신 자녀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연변대학교. 조선족이 중국에서 인정받으며 기반을 잡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대학에서 인재를 길러내고 관리로 중국의 중심무대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연변대학교. 조선족이 중국에서 인정받으며 기반을 잡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대학에서 인재를 길러내고 관리로 중국의 중심무대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우리 민족은 세계 어디를 가나 강한 생존력을 가지고 황무지를 비옥한 터전으로 만들어 살아왔다. 그 밑바탕에는 높은 교육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서전서숙, 명동학교, 연변대학을 방문하며 들었다. 요즘은 높은 교육열이라고 하면 입시위주의 기형적 행태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은 철학이 없는 교육으로 사람과 사회를 살리는 교육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인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을 기르는 교육, 즉 국가발전과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교육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