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와 함께한 만주지역 항일운동지 역사탐방 둘째 날 일정은 고구려의 유적지를 찾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고구려는 주몽이 죽고 2대 유리왕 때 수도를 환인현 졸본성에서 집안현 국내성으로 옮겼다. 우리도 그 루트를 따라 집안현으로 이동했다. 집안현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장수왕릉, 고구려 고분군 등을 볼 수 있어 고구려유적지를 대표한다. 또한 압록강과 접하여 북한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다고 하니 이래저래 기대가 큰 답사지였다.

광개토대왕비 입구에 다다르니 삼족오와 천마의 그림이 그려진 담벼락들이 보였다. 낯선 중국땅에서 삼족오를 보니 고구려땅에 왔다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광개토대왕이라는 이름은 묘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서 영토를 가장 확장했던 왕으로 기억하고픈 우리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주로 호태왕이라고 부른다.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비는 장수왕 3년(414)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세웠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비는 장수왕 3년(414)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세웠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높이가 약 6.39m로 그 규모와 위용이 광개토대왕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해준다. 비의 네 면 모두에는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44행 1,775자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주몽의 건국부터 비의 건립 경위로 시작하여, 본문에 해당되는 광개토대왕의 업적, 마지막에는 광개토왕릉을 지키는 묘지기 명단과 관리규정을 새겼다. 이 비문의 내용을 해석하는 데는 일본의 훼손, 조작설이 있고 중국과 북한 학자의 해석, 한국 학자의 해석 등 많은 논란과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에도 넓은 대륙을 무대로 호령했던 고구려가 있었고 광개토대왕이라는 영토 확장의 꿈을 이룬 왕이 있었으며 그를 기리는 한국 최대의 비가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의 해석에 얽힌 한중일 3국의 입장이 지금의 동북아정세와 다르지 않아 복잡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눈앞에 실존하는 저 광개토대왕비의 존재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 가슴에 자부심과 감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현재는 비의 마모와 훼손을 막기 위해 비각을 씌워 조금은 답답한 모습이다. 그러나 국내성처럼 아파트가 들어섰다든지 횡도천처럼 수몰된 지역이 아닌 탁 트인 벌판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오히려 폐허의 미학마저 느끼게 해준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 5분 정도 공원길을 걸으니 태왕릉이 보였다.

광개토대왕릉. 광개토대왕릉은 한 변이 약 65미터인 정방형에 21층의 거대한 돌무덤으로 맨 꼭대기에 시신을 모신 묘실이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광개토대왕릉. 광개토대왕릉은 한 변이 약 65미터인 정방형에 21층의 거대한 돌무덤으로 맨 꼭대기에 시신을 모신 묘실이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묘실은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관을 놓을 수 있는 두 개의 돌판이 있고 서너 명 정도가 들어가면 꽉 차는 좁은 공간이었다. 태왕릉은 형태가 무너지고 작은 조약돌이 쌓여 있는 사이로 풀들이 나 있어 장수왕릉에 비해 매우 훼손된 모습이었다. 태왕릉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에 주변 마을 사람들이 돌을 가져가 집 주춧돌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유네스코에 지정될 때 중국정부에서 그 집들을 허물어 다시 돌을 빼왔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다음으로는 5회분5호묘를 갈 계획이었으나 무덤 내부에 사람의 숨결이 닿지 않으면 고분벽화의 색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 일정기간 문화재 출입을 금지하는데 지금이 그 기간이어서 갈 수 없었다. 5호묘 안의 삼족오와 두꺼비가 새겨져 있는 해와 달을 든 신선과 사신도를 볼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안은 채 장수왕릉으로 향했다.

 

장수왕릉. 장수왕릉은 고구려 돌무덤 중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전형적인 피라미드 형태로 한 변의 길이가 34미터, 높이는 13미터로 전체적으로는 7층의 단을 이룬 거대한 형태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장수왕릉. 장수왕릉은 고구려 돌무덤 중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전형적인 피라미드 형태로 한 변의 길이가 34미터, 높이는 13미터로 전체적으로는 7층의 단을 이룬 거대한 형태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10년 전 사진 자료에는 사람들이 무덤에 직접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현재는 올라갈 수 없게 되어 있다. 1,100여개의 화강암을 반듯하게 깎아 쌓았고 이것이 밀려 무너지지 않도록 높이 약 5미터의 거대한 돌을 한 면에 3개씩 세로로 기대어 세웠다. 1,600년 전에 저렇게 큰 돌들을 반듯하게 깎아 쌓은 기술과 무너지지 않도록 큰 돌을 기대어 세운 건축기술이 놀라울 뿐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집안현의 칠성산을 보고 서있고 장수왕릉은 용산을 보고 서있다. 하늘의 중심인 북두칠성을 떠올리게 하는 칠성산과 하늘로 올라가는 상상의 동물 용을 떠올리게 하는 용산. 이것은 하늘에 뜻을 묻고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다음 목적지는 버스를 타고 산 쪽으로 들어갔다. 몇 년 전 도올 김용옥의 다큐멘터리영화 ‘나의 살던 고향은’에서 인상 깊게 보고 꼭 가보고싶다고 생각했던 곳이 환도산성 아래 수천기의 적석총들이었다. 그런데 그 적석총들 사이에 내가 서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돌무덤들을 보고 놀라움과 감동에 전율했다. 서울에 있는 송파구 석촌동의 백제적석총을 처음 봤을 때 그 생소함과 큰 규모에 놀랐는데 그런 돌무덤이 자그마치 4,700여기나 있으니! 돌무덤은 중국에는 없는 무덤양식으로 알타이지역, 즉 유목민족에게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과 고분군을 보니 대륙을 달리던 부여와 고구려인들의 기상이 가슴깊이 느껴졌다. 책에서 수없이 봤던 부분이지만 직접 보고 느끼는 그 감동은 또 다른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답사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다.

환도산성 아래 적석총 고분군. 돌무덤은 중국에는 없는 무덤양식으로 알타이지역, 즉 유목민족에게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과 고분군을 보니 대륙을 달리던 부여와 고구려인들의 기상이 가슴깊이 느껴졌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환도산성 아래 적석총 고분군. 돌무덤은 중국에는 없는 무덤양식으로 알타이지역, 즉 유목민족에게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과 고분군을 보니 대륙을 달리던 부여와 고구려인들의 기상이 가슴깊이 느껴졌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환도산성은 높고 큰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통구하가 흘러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였다. 강이 흘러 사람이 살기 좋고 넓은 평지에는 적석총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펼쳐져 있으며 환도산성 안의 옛 궁터는 적들의 움직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깊은 산 속 은신처가 떠오를 만큼 신비스러운 곳이었다. 우리는 조상의 무덤 앞에서 3배로는 부족하여 5배를 하려고 했으나 그곳을 지키는 공안이 그런 단체 행위를 금지하여  목례만 5배를 하고 그곳을 떠나왔다.

환도산성 아래 적석총 고분군. 이곳에는  돌무덤이 4,700여기나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환도산성 아래 적석총 고분군. 이곳에는 돌무덤이 4,700여기나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환도산성에서 내려와 평지성인 국내성을 찾아갔다. 졸본성에서 도읍을 옮겨 이곳 국내성으로 와서 450여 년간 고구려의 역사를 이어온 곳이다. 집안현의 동쪽에는 광개토왕릉 등 많은 무덤과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 있고 서쪽에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인 국내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마치 아파트 외벽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모양으로 국내성이 남아있다. 작은 모양의 돌들이 한자 ‘품(品)’자 모형으로 쌓여있는 모습이 마치 남한산성이나 한양도성의 모양을 떠올리게 한다. 낯설지 않은 성벽의 모습에 성의 나라였던 고구려의 축성기술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국내성.  작은 모양의 돌들이 한자 ‘품(品)’자 모형으로 쌓여있는 모습이 마치 남한산성이나 한양도성의 모양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국내성. 작은 모양의 돌들이 한자 ‘품(品)’자 모형으로 쌓여있는 모습이 마치 남한산성이나 한양도성의 모양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국내성 앞을 흐르는 통구하는 압록강과 이어져 북한의 초산까지 눈길이 머물게 한다. 지금은 압록강이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 되어버렸지만 고구려시대에는 같은 영역으로 고구려인들이 살았던 터전이었을 것이다. 깊고 푸른 압록강은 생각보다 훨씬 폭이 좁았다. 한강보다 좁은 압록강을 보니 이렇게 가까이 있는 우리 민족의 북한 땅을 그렇게 멀리 돌아서 다른 민족의 땅인 중국에서 바라만 봐야 하는 분단의 현실이 안타깝다.

시대별로 역사적 사명이 있다. 독립운동의 사명, 전후 복구의 사명, 민주화의 사명 등을 이루어낸 우리 민족. 지금은 분단으로 섬과 같이 고립된 상태에 놓여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체감하며 이제 우리 앞에는 세계 유일의 분단을 끝내고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통일한국에서 고구려인의 기상을 느끼며 대륙으로 달릴 그 날이 어서오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