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의 고대국가 시조 탄생 기록을 보면 난생설화가 많습니다. 은나라 시조 탕, 고구려 시조 주몽, 신라 시조 박혁거세,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 탄생설화 등이 모두 난생설화입니다. 인간은 모두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여 생긴 알에서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알’은 생명의 시작이고 생명의 결정체입니다.

이화영 인천계산공고 교사
이화영 인천계산공고 교사

이 세상은 밤과 낮, 남과 여,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등과 같이 음, 양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기에 ‘알’은 보이는 생명을 뜻하고 보이지 않는 생명은 ‘얼’이라고 합니다. 보이는 생명인 ‘알’이 자란 몸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생명인 ‘얼’을 우리 선조들은 중요시 여겼습니다.

우리가 많이 쓰는 말 중에 얼굴이 있습니다. 얼굴은 ‘얼이 드나드는 굴’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얼은 양심이라는 말과 같이 썼습니다. 그래서 양심에 어긋난 일을 하면 ‘얼굴을 들 수 없다.’라고 했고 양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얼굴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낯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밖에도 얼에 관련된 말이 많이 있습니다. 얼간이는 ‘얼이 나간 사람’, 어리석다는 ‘얼이 썩은 사람’, 어린이는 ‘얼이 어리다’, 어른은 ‘얼이 온전하다’, 어르신은 ‘얼이 신과 같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삶의 방향성을 이렇게 언어 속에 표현해 놓았습니다. 얼은 양심과 같은 말이므로 양심이 어린 상태에서 양심이 온전해져서 양심이 신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그렇게 살아라,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고 어르신이 되는 게 아니라 양심이 밝아져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생명인 얼은 ‘큰 나’이고 보이는 생명인 몸은 ‘작은 나’입니다. 큰 나인 얼에서 나오는 마음은 좋은 마음입니다. 좋은 마음을 한자로 쓰면 좋을 양(良) 마음 심(心) 양심입니다. 모든 사람의 양심은 같습니다. 만약에 사람마다 양심이 다르다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양심껏 해라’ 서로 양심이 다르다면 양심껏 하라는 말을 못합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양심은 같다.’라는 직관적인 전제가 있으니까 양심껏 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너와 나의 구분이 없습니다. 따라서 양심의 뿌리인 ‘얼’도 너와 나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큰 나’입니다. 큰 나인 얼에서 나오는 양심은 너와 나의 구분이 없기에 남을 나처럼 여깁니다. 남을 나처럼 여기기에 홍익, 사랑 자비 등을 실천하기가 쉽습니다.

천부경에 본심본태양앙명(本心本太陽昻明)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이것은 ‘본래의 마음은 본래 태양처럼 광명하다.’는 뜻입니다. 대학(大學) 첫 장에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명명덕(在明明德)이라고,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다시 밝히는 데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얼이 본심(本心)이고 밝은 덕(明德)입니다. 따라서 얼은 태양처럼 밝고 태양처럼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얼에서 나오는 양심도 밝고 변함이 없습니다. 얼은 변함이 없기에 ‘변하지 않는 나’ 라고 하고 진짜 나라는 의미로 ‘참나’ 진아(眞我)라고도 합니다.

작은 나인 몸에서 나오는 마음은 나뿐인 마음입니다. 이것을 한자로 쓰면 이기심(利己心)입니다. 이기심은 너와 나의 구분이 있습니다. 몸이 너와 나의 구분이 있기에 몸에서 나오는 마음도 너와 나의 구분이 있습니다. 몸에서 나오는 마음에는 생각, 감정, 오감(五感;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의 5가지 감각)이 있습니다. 생각, 감정, 오감은 변합니다. 그래서 생각, 감정, 오감을 ‘변하는 나’라고 하거나 ‘가짜 나’ 라는 의미로 ‘가아(假我)’ 또는 ‘에고(ego)’라고도 합니다.

‘에고’로부터 나오는 이기심은 자신의 이익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홍익, 사랑, 자비의 실천이 어렵습니다. 이기심이 모두 안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양심에 맞는 이기심은 좋습니다. 양심에 맞지 않는 이기심이 안 좋습니다. 따라서 이기심을 양심에 따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기심을 양심에 따르게 할까요?

중용(中庸) 첫 장에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본성(양심)이라 이르고, 본성(양심)을 따르는 것을 길(道)이라 이르며, 길을 닦는 것(修道)을 가르침(敎)이라 이른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기심이 양심을 따르게 하려면 수도(修道) 또는 수행(修行)을 해야 합니다. 수행의 방법으로는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나오는 대로 지감(止感) 생각과 감정을 그치고, 조식(調息) 호흡을 고르게 하며, 금촉(禁觸) 오감을 절제해서 바르지 못한 행동을 금하게 해서 정충 기장 신명(精充氣壯神明)의 원리로 정이 충만하면 기가 장해지고 기가 장해지면 신이 밝아지는 단계로 양심이 밝고 강해집니다. 양심이 밝고 강해지면 자연히 이기심은 양심을 따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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