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서울지방보훈청이 후원하는 현충시설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을 학교역사수업과 연계하여 현충시설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하였다. 6월 14일 서울태랑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다녀왔다. 17일에는 학교에서 ‘독립영웅들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수업을 들었다.

안중근의사 유묵의 손도장에 손을 대어보는 학생들.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으로 6월 14일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다녀왔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안중근의사 유묵의 손도장에 손을 대어보는 학생들.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으로 6월 14일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다녀왔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일제는 우리민족의 정기를 누르기 위해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웠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남산에 세운 건 일제의 잔재와 굴욕을 씻어낸다는 의미가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1970년 건립했는데, 현재의 건물은 2010년 새롭게 개관한 것으로 서울시 건축상 공공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탐방에 참여한 학생들은 입구에 들어서는 벽면의 안중근의사 유묵 손도장에 손을 대어보며 그 뜻을 새겼다. 전시관 1층에 자리 잡은 안중근의사 동상과 혈서를 쓴 태극기 앞에서 묵념을 하며 숙연해진다.

1층에서 3층까지 이어지는 전시관에는 안중근의사가 활동하던 시대상황을 시작으로 어린 시절, 가족관계, 의병활동, 동의단지회, 하얼빈역 의거, 재판과정, 순국에 이르기까지의 자료를 전시한다. 안중근 의사는 일제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험에 처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세계만방에 조선의 민족혼이 살아있음을 알린 민족의 영웅이다.

안중근의사 추모.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안중근의사기념관 내 안중근의사 동상 앞에서 안중근의사를 추모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안중근의사 추모.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안중근의사기념관 내 안중근의사 동상 앞에서 안중근의사를 추모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단순히 우리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를 처단하였다는 사실을 재판장에서도 꾸준히 알리고 옥중에서도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다. 비록 저서를 완성하지 못하고 순국하여 아쉬움이 있으나 동양평화론의 구상은 오늘날 유럽공동체인 EU와 흡사한 것으로 100년을 앞서본 선각자이자 사상가의 면모를 알 수 있다.

동의단지회.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동의단지회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잘린 손가락을 생각하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동의단지회.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동의단지회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잘린 손가락을 생각하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여 손가락을 잘라 결의를 다진 안중근의사의 용기에 학생들은 놀라움과 존경을 표하였다. 독립운동기간 중 많은 의거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성공한 몇 안 되는 의거 중 하나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재판의 과정도 하나의 독립운동으로 여겨 재판장에서 이토의 죄목 15가지를 이야기하며 개인 자격으로 죽인 것이 아닌 대한의군 참모총장으로 의거를 하였노라 밝혔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해설을 듣는 학생들.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으로 6월 14일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다녀왔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해설을 듣는 학생들.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으로 6월 14일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다녀왔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그의 논리정연한 주장과 의연한 태도에 재판을 참관한 사람들이 존경심을 보였다. 안중근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주고 항소하는 것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과 같으니 나라를 위해 당당히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아들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여성독립운동가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또한 안중근의 두 동생들을 포함해 그의 일가에서는 15명이나 되는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이러한 가문이야 말로 명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의사기념관 탐방.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안중근의사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안중근의사기념관 탐방.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안중근의사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안중근의사는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31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내가 죽으면 뼈를 하얼빈공원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에 묻어주기를 바라면서 천국에서도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라고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1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찾지 못하고 서울 효창공원에는 허묘가 있을 뿐이다.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찾아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기려 국권을 지키고 더 나아가 동양의 평화를 위해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을 탐방한 서울태랑초등학교 학생들에게 17일 독립영웅들을 찾아서 수업을 진행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안중근의사기념관을 탐방한 서울태랑초등학교 학생들에게 17일 독립영웅들을 찾아서 수업을 진행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학생들은 교실수업에서도 안중근의사의 굳은 의지와 신념, 용기를 기억하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에 감사하는 후기를 남겼다. 또한 안중근이라는 영웅이 나오기까지 경제적인 지원을 해준 최재형, 함께 거사를 준비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그리고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등 많은 인물이 있었음을 알고 함께 만들어가는 역사의 소중함을 배웠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14일 시행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14일 시행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또 다른 현충시설인 안중근기념관 아래 백범광장에 있는 백범김구 동상과 이시영 선생의 동상을 둘러보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교육에도 힘쓰신 민족의 지도자들을 기렸다. 인간에게 육신의 수명은 100년이 채 되지 않지만, 후손에게 주는 영향, 역사적인 평가 등은 오래도록 남는 것임을 알고 잘산다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