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부인 고 이희호 여사의 사회장 추모식이 6월 14일 엄수됐다. 정부 주관으로 이날 오전 9시 30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추모식에는 각계 지도자와 시민 2천 여명이 참석했다.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부인 고 이희호 여사의 사회장 추모식이 6월 14일 오전 9시 30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엄수됐다. [사진=KTV화면 갈무리]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부인 고 이희호 여사의 사회장 추모식이 6월 14일 오전 9시 30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엄수됐다. [사진=KTV화면 갈무리]

고 이희호 여사 공동장례위원장인 이낙연 국무총리는 추모식 조사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위대한 인물을 잃었다. 우리는 현대사의 고난과 영광을 가장 강렬하게 상징하시는 이희호 여사님을 보내드려야 한다”며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헤쳐오신 여사님의 생애를 두고두고 기억하며,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겠다”고 다짐했다.

이 총리는 “지금 가시는 그곳에는 고문도 없고 투옥도 없을 것이다다. 연금도 없고 망명도 없을 것이다. 납치도 없고 사형선고도 없을 것이다”며 “그곳에서 대통령님과 함께 평안을 누리시기를 기원한다”고 추모했다.

서울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6월14일 열린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부인 고 이희호 여사의 사회장 추모식에서 공동장례위원장인 이낙연 총리가 조사를 하고 있다. [사진=국무조정실]
서울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6월14일 열린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부인 고 이희호 여사의 사회장 추모식에서 공동장례위원장인 이낙연 총리가 조사를 하고 있다. [사진=국무조정실]

 

다음은 이낙연 국무총리 故 이희호 여사 추모식 조사 전문

우리는 이 시대의 위대한 인물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현대사의 고난과 영광을 가장 강렬하게 상징하시는 이희호 여사님을 보내드려야 합니다.

여사님은 의사의 딸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보통의 행복을 누리실 수도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여사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평탄할 수 없는 선구자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시대를 앞서 여성운동에 뛰어드셨습니다.

특히 여사님은 아이 둘을 가진 홀아버지와 결혼하셨습니다. 남편은 결혼 열흘 만에 정보부에 끌려가셨습니다. 지독한 고난은 그렇게 신혼을 덮치며 시작됐습니다.

남편은 일본에서 납치돼 알 수 없는 바다에 수장되실 뻔했습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다섯 차례나 죽음의 위기를 겪으셨습니다. 가택연금과 해외 망명도 이어졌습니다. 장남도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여사님 스스로도 어린 아들들과 감시 속에 사셨습니다.

그런 극한의 가시밭길을 여사님은 흔들림 없이 이겨내셨습니다. 감옥에 계시는 남편을 생각해 한겨울에도 방에 불을 넣지 않으셨습니다. 남편이 감옥에 계시거나 해외 망명 중이실 때도, 남편에게 편안을 권하지 않으셨습니다. 늘 하나님의 뜻에 따라 투쟁하라고 독려하셨습니다. 훗날 김대중 대통령께서 “아내에게 버림받을까 봐 정치적 지조를 바꿀 수 없었다”고 고백하실 정도였습니다.

여사님은 그렇게 강인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온유하셨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당신을 가로막는 경찰의 가슴에 꽃을 달아주셨습니다. 함께 싸우다 감옥에 갇힌 대학생들에게는 생활비를 쪼개 영치금을 넣어주셨습니다. 동교동에서 숙직하는 비서들의 이부자리를 챙기셨습니다.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누구에 대해서도 나쁜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죄는 미워했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나긴 고난의 끝에 영광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셨습니다. 분단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하셨습니다. 우리 국민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외신은 “노벨평화상의 절반은 부인 몫”이라고 논평했습니다. 저는 정권교체의 절반도 여사님의 몫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사님은 평생의 꿈을 남편을 통해 하나씩 이루어 가셨습니다.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총리가 지명됐으며, 양성평등기본법이 제정되는 등 여성의 지위향상과 권익증진이 시작됐습니다. 기초생활보장제가 도입되는 등 복지가 본격화했습니다.

10년 전, 여사님의 반려이자 동지인 대통령께서 먼저 떠나셨습니다. 그때부터 여사님은 대통령님의 유업을 의연하게 수행하셨습니다. 북한을 두 차례 더 방문하셨습니다. 영호남 상생 장학금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여사님은 유언에서도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사님께서 꿈꾸셨던 국민의 행복과 평화통일을 향해 쉬지 않고 전진하겠습니다. 영호남 상생을 포함한 국민통합을 위해 꾸준히 나아가겠습니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헤쳐오신 여사님의 생애를 두고두고 기억하며,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겠습니다.

여사님, 지금 가시는 그곳에는 고문도 없고 투옥도 없을 것입니다. 연금도 없고 망명도 없을 것입니다. 납치도 없고 사형선고도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대통령님과 함께 평안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여사님, 우리 곁에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사님이 계셨던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