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들 그림책 수업에 적용할 우리 역사에 관한 스토리텔링의 경험을 듣고 싶어요.”

그림책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요청받았다. 선생님은 미술을 전공한지라, 우리 역사를 어린 아이들에게 알려 줄 때는 조심스럽다고 한다. 아이들은 스펀지와 같아 그대로 흡수한다고 한다. 혹시라도 우리 역사를 잘못 알려줘서 아이들의 역사인식에 악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로 우리 역사를 알려 주고 싶다고 하였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그런데 역사와 역사이야기는 다르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면 역사이야기는 화자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해서 전달하는 것으로 이때 화자의 시각과 관점이 중요하다. 사람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거나 전혀 다른 인물이 되곤 한다.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식되는 것처럼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개인의 삶도 역사가 될 수 있다. 대개 개인의 역사를 기록한 것을 일기라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난중일기’, ‘안네의 일기’ 등이 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일기를 넘어 한 나라의 역사가 되었고 나아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갖는 개별성이 보편성을 띠게 되면 위대한 역사가 된다. 역사가 된 일기의 또 다른 사례가 ‘안네의 일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 유대인 가족이 겪어야 했던 전쟁의 참혹함, 그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낳은 결과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역사적 사실 vs. 역사 스토리텔링(역사소설, 드라마, 영화 등)

사실이지만 믿지 못할 혹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고 허구지만 ‘대개 그러하다’라고 하는 개연성을 갖게 되면 믿을만한, 있을 법한 이야기가 되면서 공감을 통한 감동을 주게 된다. 감동을 받으면 감정의 정화가 일어나게 되며 자기의 삶을 뒤돌아 볼 수 있게 한다. 때로는 반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삶에 강력한 열정과 동기부여를 받게 된다.

역사이야기를 들려 줄 때는 화자가 이야기를 듣는 대상의 눈높이에 맞춰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교훈, 즉 어떤 메시지를 부여할 것인지 고민해야 된다. 그 이야기가 아이들의 인성(인격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심사숙고 하여야 한다. 요즈음 아이들은 조기 교육의 영향으로 지식으로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보다는 한 역사적 사실이 그 시대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고 지금은 어떤 가치가 있으며 앞으로 다가 올 미래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이러한 역사 이야기 즉, 역사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역사가 스토리가 되고 그것을 대화 또는 말하기를 통해 그것을 온전하게 전달하려면 흥미유발이 되어야 하고 쉽고 재미있어야 된다. 그런데 왜 역사는 재미가 없다고 느낄까?  사람들은 자기와 관심 있는 역사적 사실에만 흥미를 느낀다. 자기의 삶과 분리된 역사는 관심이 없다. 만약 자기가 좋아하는 이성이 있다면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할 것이고 알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어떻게 역사에 관심을 갖도록 할 수 있을까?

조선전기 세종 때 문신으로 대사헌, 형조참판까지 역임하였던 ‘고약해’(高若海)라는 인물이 있었다. ‘고약해’, 즉 ‘고약한 사람’의 어원이 되는 인물이다. 백성을 위해 왕 앞에서도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 지금으로 보면 주관이 뚜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무례한 인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세종 7년 11월 20일, 사간원에서 격구를 폐지해야 한다고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격구 하는 일을 반드시 이렇게까지 극언(極言)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니, 지사간(知司諫) 고약해가 대답하기를, "신 등이 격구를 폐지하자고 청한 것은 다름 아니라, 뒷세상에 폐단이 생길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성명(聖明)하신 이때에는 비록 폐단이 있기에 이르지 않으나, 뒷세상에 혹시나 어리석은 임금이 나서 오로지 이 일만을 힘쓰는 이가 있다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고 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무례한 언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도로 고약해는 왕 앞에서도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간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부 과장된 표현일 수는 있겠지만 왕이 간언을 들으려 하지 않자 왕을 노려보거나 심지어 어전회의 중에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거나 하는 행위를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분명 불충이고 불경스러운 일이었기에 많은 대신이 고약해를 벌하자고 하였지만 세종대왕은 그럴 때마다 껄껄 웃으시면서 “내가 만약 그를 잡아다 하옥하고 엄히 그 죄를 묻는다면 어느 누가 나서 왕인 내게 직언을 하겠는가?”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왕의 그 신하라는 얘기가 나올 만하다.

세종대왕 vs. 고약해

세종대왕의 업적은 훈민정음 창제, 과학기술의 발달, 농업기술의 향상, 국방정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지만 그 중에서도 애민정책이 으뜸이다.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해 나랏일을 하는 관료들과의 소통 또한 중시하였다. 당시 소통의 리더십을 몸소 실천하셨던 세종대왕이 계셨기에 고약해라는 인물이 나올 수 있었다.

반면 왕 앞에서도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목숨 걸고 간언을 하였던 고약해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세종대왕이 역사적으로 가장 추앙받는 성군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약한’의 원래 의미는 부정적인 의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후대로 어의가 전승되면서 긍정적인 의미는 퇴색하고 부정적인 의미만 남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고약해와 다른 방식으로 살았던 인물이 있었다. 그를 통해 다른 역사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세종대왕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많았다. 장자가 세자였던 문종이고, 그 뒤에 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불운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훌륭한 인물이 많았다. 세종 사후에 문종이 즉위하였고, 문종은 부왕인 세종을 따라 훈민정음 창제 등 많은 일에 관여하였고 과로한 탓으로 즉위 전에 이미 병들어 있었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던 문종은 어린 단종을 안고 훗일을 부탁하였을 때, 함께 동고동락했던 집현전 학자들인 신숙주, 성삼문 등 여러 신하는 죽음으로 맹세하였다.

신숙주 vs. 성삼문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때 충신들을 도륙할 때, 신숙주는 집현전 학자 중에서 가장 먼저 변절하여 정인지와 더불어 수양대군 편에 섰다. 신숙주는 집현전의 동지들이 참형을 당하던 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소복을 입고 있었던 부인 윤씨는 꾸짖기를 “나는 대감이 살아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구려. 성 승지(성삼문)와 대감이 얼마나 친하였소. 어디 형제가 그런 형제가 있을 수 있었소. 성 학사, 박 학사 등 여러 집현전 학사들이 옥사하게 생겼으니 필히 대감도 함께 돌아가실 줄만 알고 기별만 오면 따라 죽을 양으로 이렇게 소복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대감이 살아 돌아오실 줄 누가 알았겠소. 그런 변절 배신이 또 어디 있겠소.” 하고 몰래 다락으로 들어가 목메어 죽었다.

그럼에도 신숙주는 그 뒤 여러 왕을 모시면서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을 여러 번 하는 등 권력의 최고 정점에 이르렀다. 영원할 것 같은 권력도 결국 무너지고 오래 살 것 같은 생명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16세기에 이르면 조선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지방으로 흩어져 초야에 묻혀 살았던 사림파들이 중앙으로 진출하여 권력을 잡게 되면서 정통 성리학을 통한 대의명분을 중시하게 된다. 성삼문 등 사육신과 김시습 등 생육신의 신원이 복원되면서 사림들에 의해 그들의 충절을 기리게 되었고, 신숙주는 제대로 된 역사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배반의 아이콘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이렇듯 신숙주가 배반하였으므로 그 후 잘 변하는 녹두 나물을 숙주나물이라 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숙주나물을 짓이겨 만두 속에 넣어 먹으면서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고 신숙주 등 변절자들을 욕하였다. 이러한 ‘숙주나물 고사’는 역사 연구가들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로 봐서 변절했다는 것을 매우 나쁘게 생각해서 이런 이야기가 나돌았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공교롭게도 오늘 점심 반찬이 삼겹살과 함께 볶은 숙주나물 무침이다. 숙주나물은 모름지기 자근자근 씹어 먹어야 제 맛이다. 숙주나물을 씹으면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역사의 가르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또한 옳고 그름의 판단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스토리텔링 할 것인가. 시대 흐름에 맞춰 무엇이 진실이 되는지를 봐야 된다. 왜냐하면 화자가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믿음에 부응할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져버리고 말할 것인지를 정해야 되기 때문이다. 공감과 감동의 끝에는 믿고 싶은 이야기와 믿어야만 하는 이야기가 항상 존재한다.

역사가 무심하듯 흐르고 있지만 역사의 평가는 냉혹하리만큼 철저하다. 역사의 진실을 그냥 물이 덮고 지나 간 것 같지만 언젠가는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마련이다. 노자(老子)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역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그러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