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서울지방보훈청이 후원하는 현충시설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을 매주 실시한다. 그 두 번째 탐방으로 5월 25일 북촌한옥마을에 있는 조선어학회터와 중앙고등학교 내 현충시설을 찾았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25일 시행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조선어학회터 앞에서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한글학자들을 알아보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25일 시행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조선어학회터 앞에서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한글학자들을 알아보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대일항쟁기 일본은 우리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못 쓰게 하였다. ‘한글’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주시경 선생은 ‘말-글-얼’ 삼위일체언어관을 이야기하며 우리말을 지키는 것이 곧 정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여 한글운동에 앞장섰다. 조선어강습회를 열어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인 홍암 나철 선생의 ‘국망도존(國亡道存: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정신을 소개하며 문화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나가게 했다. 그곳에서 이극로, 최현배, 김두봉 등 대표적인 한글학자들이 주시경의 제자로 한글운동에 앞장섰고 주시경 사후 조선어학회를 만들어 이끌어가게 되었다. 그 조선어학회 건물이 있었던 터가 북촌 윤보선가옥 앞에 있다. 이곳은 대일항쟁기에 독립운동을 후원했던 건축업자 정세권이 토지와 건물을 조선어학회에 기증한 것이다. 지금 돈으로 12억 원에 달하는 그 부지와 건물을 그 어떤 대가도 없이 우리의 한글을 지키는데 바친 것이다.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25일 조선어학회 터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25일 조선어학회 터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1942년 일제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친일로 돌아섰지만 조선어학회의 한글학자들은 변절자가 없는 것에 주목하고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켜 한글학자 33명과 그에 협력한 48명을 잡아간다. 이때 감옥에서 고문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10명이나 되니 그 고통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때 정세권도 손톱이 다 뽑히는 끔찍한 고문을 받고 많은 재산도 몰수당하는 고통을 받게 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옥에서 나온 이극로, 최현배 등 생존자들은 우리나라의 교과서를 만들고 대일항쟁기에 완성하지 못한 우리말 큰사전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 내용이 올해 초 영화 ‘말모이’로 나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어학회는 현재 한글학회라는 이름으로 지속되어 활동한다.

터만 남아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 뜻만큼은 가슴에 뜨겁게 새기고 길 건너에 있는 정독도서관의 서울교육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우리 민족이 그 오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저력은 교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인들은 학창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많은 소품들을 보며 그 시절을 떠올렸고 학생들은 옛날 학용품과 교복 등이 마냥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다. 특히 6.25전쟁 당시 천막교실을 보며 그 어려운 피난시절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교육열을 느낄 수 있었고 지금의 발전된 교육환경에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다. 특별전시회로 여성독립운동가 특별전이 열려 보훈처 사업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라고 외치며 편안한 유학생의 길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김마리아,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서 의지를 다지고 우리의 독립의지를 알렸던 남자현,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총독부를 파괴하고 싶다고 했던 권기옥 등 많은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서울교육박물관에서 학생들이 과거의 교육시설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서울교육박물관에서 학생들이 과거의 교육시설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외국관광객들이 우리의 한복을 입고 아름다운 한옥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며 북촌골목을 올라 중앙고등학교에 도착했다. 인기 드라마와 뮤직비디오 등을 찍은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한류의 중심으로 알려져 외국관광객들도 많았다. 이곳에는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가지고 들어온 일본유학생 송계백이 중앙고를 찾아와 숙직실에서 당시 교장이었던 송진우 등과 함께 3.1운동을 계획했던 역사적인 장소가 있다. 어린 학생들이 일본의 중심에서 독립을 외치려고 한다는 소식에 우리 땅에서도 독립선언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천도교를 중심으로 기독교, 불교계 인사들 33명이 고종의 장례식에 맞춰 1919년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된 것이다.

1926년 순종의 장례식 때 독립운동이 침체되는 시기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으니 바로 6.10만세운동이다. 순종의 상여가 단성사를 지날 때 당시 중앙고학생 300여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갔기에 6·10만세기념비도 이곳에 있는 것이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25일 진행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중앙고등학교 내에 있는 6.10만세운동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25일 진행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중앙고등학교 내에 있는 6.10만세운동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참가자들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알면 사랑하게 되듯이 단순히 기와집이 있는 북촌한옥마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뜨거운 역사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북촌한옥마을이 다시 보인다고 말했다. 대일항쟁기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고, 한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재능과 재산과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의 노력을 알게 되어 한글이 더욱 자랑스럽다고 한다. 또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는 사람이 먼저 행동했던 지식인의 책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목숨으로 지킨 우리의 나라와 문화.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 소중함에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끼게 된 탐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