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 김혁 장군 순국 제80주기 추모제가 23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개최되었다. 오석김혁장군유족회와 용인국학원이 공동 주최한 이날 추모식에는 표창원 국회의원, 백군기 용인시장, 이용기 서울남부보훈지청장, 박용주 경기동부보훈청장, 김수홍 경기국학원장 등 내외빈과 유족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오석 김혁 장군 제80주기 추모제가 23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개최되었다. [사진=김민석 기자]
오석 김혁 장군 제80주기 추모제가 23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개최되었다. [사진=김민석 기자]

‘칼을 찬 선비’라 불렸던 김혁 장군의 묘역에서 묘제를 지내고, 그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을 시청하며 본격적인 추모식이 시작됐다.

백군기 용인시장은 추모사를 통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용인에서 3·1운동을 주도하시고, 김좌진 장군과 함께 신민부를 창립하시어 독립군 양성에 많은 노력을 쏟으셨던 김혁 장군을 기억하겠다. 장군의 희생을 기억하고, 업적을 후세에 널리 알리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용기 서울남부보훈지청장은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주권을 되찾고, 위대한 발전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김혁 장군과 같은 애국선열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정부는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오늘 이 자리가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고,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오석 김혁 장군 제80주기 추모식에서 이용기 서울남부보훈지청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오석 김혁 장군 제80주기 추모식에서 이용기 서울남부보훈지청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표창원 국회의원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던 김혁 장군의 심정을 감히 헤아려본다. 민족의 영웅이자 구국의 투사였던 장군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평화롭고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하나 된 조국,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추모사를 전했다.
 

표창원 국회의원은 23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오석 김혁 장군 제80주기 추모식에서
표창원 국회의원은 23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오석 김혁 장군 제80주기 추모식에서 "평화롭고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하나 된 조국,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추모사를 전했다.

김수홍 경기국학원장은 “장군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우리의 가슴 속에 깊이 살아계신다.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삶의 전부를 독립운동을 위해 바친 장군의 고귀한 정신을 알리겠다.”고 추모사를 낭독했다.
 

김수홍 경기국학원장이 오석 김혁 장군 제80주기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김수홍 경기국학원장이 오석 김혁 장군 제80주기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내빈 추모사에 이어 고범석 용인국학기공협회장이 김혁 장군의 어록을 낭독하며, 조국독립을 향한 그의 마음을 절실하게 전달했다. 이후 오석 김혁 장군의 증손자인 김성태 씨가 백년편지를 낭독했고, 경기도국학기공협회 회원 33명이 나라사랑기공을 선보이며 추모공연을 펼쳤다. 
 

23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오석 김혁 장군 제80주기 추모식에서 고범석 용인국학기공협회장이 오석 김혁 장군의 어록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23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오석 김혁 장군 제80주기 추모식에서 고범석 용인국학기공협회장이 오석 김혁 장군의 어록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경기도국학기공협회 회원 33명이 23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오석 김혁 장군 제80주기 추모식에서 나라사랑기공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경기도국학기공협회 회원 33명이 23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오석 김혁 장군 제80주기 추모식에서 나라사랑기공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1875년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한 오석 김혁 장군은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 근무하다 지난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되면서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에는 용인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만주로 망명해 무장 독립투쟁을 이끌었으며, 이듬해 흥업단(興業團)과 대한의용군의 부단장으로도 활동했다.

1921년에는 대한독립군 군사부장을 역임했고, 1923년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년 뒤인 1925년에는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할 수 있는 신민부를 조직해 중앙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군사부위원장과 외교부위원장으로 추대된 김좌진, 조성환 등과 함께 대일항쟁을 위해 진력했다. 당시 신민부에서 체계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면서 김혁 장군은 교장으로 임명되며 북만주지역의 독립군 최고지도자로 활약했다.

1929년 6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7년형을 구형받고, 6월 13일 최종 판결에서 10년형을 받았다. 평양감옥에 수감 되었던 그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 병환이 위독해져 가출옥(假出獄)했으나 9년여 동안의 모진 옥고의 여독을 견디지 못하고 용인 본가에서 1939년 4월 23일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오석 김혁 장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묘는 고향인 용인 농서리에 있었으나, 지난 1974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1985년 용인시 기흥구 구갈리에 오석 김혁 장군 독립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2002년 4월에는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용인시에서는 지난 2016년부터 김혁 장군의 항일 무장 독립투쟁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오석문화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