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재실)는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안창호기념관 강당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 81주기 추모제'를 거행했다. 추모제에는 이병구 국가보훈처 차장, 정순균 강남구청장, 도산안창호함 함장 김현중 대령,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및 회원, 학생, 시민 등 400여명이 참석했다. 

추모제는 도산선생 약력보고, 헌사 및 추모사, 추모가 제창, 헌화 및 분향, 폐회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재실)는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안창호기념관 강당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 81주기 추모제'를 거행했다.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재실)는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안창호기념관 강당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 81주기 추모제'를 거행했다.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김재실 회장은 추모사에서 "나라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60평생을 몸바친 위대한 지도자 도산 안창호선생은 겨레의 스승"이라며, "망국(亡國)의 질곡 속에서도 오롯이 진선미를 추구하는 인격적 삶을 한평생 몸소 사시며 가르치고 펼치셨으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 도리를 실천하고 체득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고 말했다.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은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에서 아버지 순흥 안씨 흥국(興國)과 어머니 제남 황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면서 할아버지 슬하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부터 14세까지는 서당에서 김현진에게 유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 16세의 청년 도산은 청일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 서울의 밀러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도산 안창호 선생 81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도산 안창호 선생 영정 앞에 헌화 및 분향했다.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도산 안창호 선생 81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도산 안창호 선생 영정 앞에 헌화 및 분향했다.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졸업 후 독립협회 민권운동에 참여하여 평양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한 연설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일본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자, 선생은 교육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이혜련과 혼인하고 그 이튿날 선생 부부는 함께 인천항을 출발해 유학길에 올랐다.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영어를 배우며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하였다. 1904년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한인공동체를 이끌어 나갔다.

그 사이 일제는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였다.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던 선생은 1905년 4월 5일, 조국 광복을 사업목표로 한 정치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이때 28세로 초대 회장에 취임한 선생은 공립협회 회관을 마련하고 '공립신보'를 발간, 각지에 지방회를 만들어 공립협회를 지도하였다. 선생은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하고 그 설립 취지서를 안고 1907년 2월 20일 국내로 돌아왔다.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의 생전 모습.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의 생전 모습.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선생은 귀국 후 서북학회 등의 표면활동과 함께 평양 대성학교와 태극서관, 마산동 도자기회사 등을 설립해 교육 및 산업진흥운동을 전개하고 가옥 개량과 모범농장 건설, 여성교육의 필요성 제창, 국가(國歌) 보급운동 등 다양한 국민운동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통해 국권회복을 위한 준비를 전개했다.

한편, 대한제국을 식민통치하기로 예정한 일제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하며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날 해산 군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일본군과 일대 시가전이 벌였으나, 해산 군인들의 탄환이 떨어지자 일본군은 해산군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그 해 11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선생과의 회견을 요청, 선생에게 ‘청년내각’ 구성을 제안하며 회유했지만 선생은 단호히 이토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국내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운동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판단한 선생은 공립협회와 함께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해 항일투쟁하기로 계획했다. 이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공립협회의 지도자인 선생은 안중근 의거 배후 혐의로 일경에 피체됐다. 1910년 3월, 선생은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구국전략으로 채택하였다. 

1910년 4월 7일, 선생은 중국인 소금상선을 타고 비밀리에 중국 위해위로 탈출해 독립군 양성에 매진했다. 1911년 2월, 북만주 밀산의 개척지를 답사하고 그 해 9월 미국 뉴욕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설립해 하와이, 북미,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지방총회를 두고, 각 지방총회 아래에 160여개의 지방회 조직을 거느렸다. 멕시코와 쿠바지역과 필리핀에까지 지방회 조직을 둔 대한인국민회조직은 세계 한인사회 네트워크였다. 

1919년 3.1운동 발발 소식이 3월 9일 선생에게 전달되었다. 선생은 신속히 3.1운동의 소식을 북미, 하와이, 멕시코 등지에 전파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전 세계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외교활동을 전개할 것과 전 동포사회가 독립전쟁 준비에 단결해 줄 것, 특히 북미, 하와이, 멕시코 재류동포들이 재정공급과 선전활동에 주력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윌슨 대통령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 5국 대사에게 한국민의 절대독립의 의지를 알리고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대표출석권을 안정해 줄 것을 간절히 청원하였다.

1920년, 선생은 중국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취임하고, 곧바로 임시정부의 시정방침을 발표하였다. 시정방침으로는 인구조사를 행하고 국채를 발행해 재정을 확보할 것과 인두세를 징수하고 군사력 증강에 노력할 것, 그리고 구국재정단을 조직할 것과 파리와 워싱턴을 중심으로 외교에 힘쓰고, 한인관계사를 조사하는 방안 등을 발표하였다. 그 외에도 선생은 연통제 실시와 교통국 설치를 추진해 국내와 임시정부와의 연락 교통망을 구축해 국민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북간도와 서간도 등지에 선전원과 특파원을 파견해 만주의 독립군 조직을 정부산하로 통합하고자 했다. 

1921년, 선생의 독립 노력에도 임시정부는 좌우 운동세력의 내분과 재정 위기에 처해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방략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선생은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해 나갔다. 1927년 1월, 선생은 ‘조선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이 때 들이닥친 중국경찰에 피체되어 20여일 만에 풀려났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가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인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하여 7명의 일본군과 정부 수뇌들을 일시에 쓰러뜨렸던 날, 상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다가 선생은 프랑스와 일본 영사관 합동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감옥으로 이송되어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하였다.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선생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38년 3월 10일, 만 59년 4개월을 일기로 서거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됐다가 1973년 도산공원으로 옮겨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