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손병희(1861.4.8.~1922.5.19.) 선생을 2019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손병희 선생은 1861년 충북 청원(청주)에서 출생하여 1882년 동학에 입문하여 2년 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받았다. 1894년 동학혁명때 호서지방 중심의 북접(北接) 사령관인 통령(統領)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기수로서 활약하기에 이른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에서 은신생활을 하였다. 1897년(광무1)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1년(광무5) 일본을 경유해서 상해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으로 개명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전해 듣고, 1905년(광무 9)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최시형의 뒤를 이어 3세 교주로 취임하여 교세확장 운동을 벌였다. 한편으로는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설하고 보성학교(普成學校)와 동덕학교(同德學校)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공헌, 민족의 동량을 육성하였다. 1908년(융희2) 박인호(朴寅浩)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의암 손병희 선생.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손병희(1861.4.8.~1922.5.19.) 선생을 2019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사진제공=독립기념관]
의암 손병희 선생.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손병희(1861.4.8.~1922.5.19.) 선생을 2019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사진제공=독립기념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崔麟)·천도교 도사(道師)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사항을 협의하였다. 선생은 1919년 1월 동경유학생의 2․8독립선언계획, 신한청년당 및 기독교계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독립선언 방식의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하여 독립의 열망을 알리고, 일본의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의 열국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와 청원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등이 완성되자 선생은 직접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검토가 이루어진 후, 천도교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에 날인하였고 2월 28일 선생의 집으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민족대표를 불러 협의하여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거나 배포하면 소동이 일어날까 우려한 것이다.

손병희 선생 유묵. 정영(精英)은 정예롭고 뛰어난 사물이나 사람을 말한다. [사진제공=독립기념관]
손병희 선생 유묵. 정영(精英)은 정예롭고 뛰어난 사물이나 사람을 말한다. [사진제공=독립기념관]

거사일인 3월 1일, 선생은 태화관에 모인 28인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하여 자진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선생과 다른 민족대표가 점화한 3․1운동은 이후 요원의 불길처럼 국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병상일지 (천도교 중앙도서관 자료실 소장). 손병희 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병을 얻어 풀려난 뒤 치료할 때 작성한 일지. [사진제공=서울역사박물관]
병상일지 (천도교 중앙도서관 자료실 소장). 손병희 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병을 얻어 풀려난 뒤 치료할 때 작성한 일지. [사진제공=서울역사박물관]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뇌출혈로 가출옥하였으나 1922년 5월 19일 생을 마감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서울 우이동 언덕에 안장되었다.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세운 선생의 동상은 독립된 국가의 앞길을 지켜보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