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경상남도 '창녕 계성 고분군(昌寧 桂城 古墳群)'과 경상북도 '경주 분황사지(慶州 芬皇寺址)', '경주 구황동 원지 유적 일원(慶州 九黃洞 園池 遺蹟 一圓)'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각각 지정하였다.

사적 제547호 '창녕 계성 고분군(昌寧 桂城 古墳群)'은 영축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사면부에 조성된 261기의 대규모 고분군이다. 1917년 처음으로 고분군의 분포도가 작성된 이후 최근까지 발굴조사가 5차례 있었으며, 그 결과 5세기에 축조된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인 대형 고총 고분과 6~7세기에 축조된 앞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 석실)이 모두 확인되었다. 

이러한 축조 양식의 변화는 고분군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며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창녕 지역에서의 가야의 성립, 발전과 쇠퇴 과정을 추정해볼 수 있다. 고분의 변화 양상과 출토 토기 양식 등을 통해 창녕과 주변 지역의 5~7세기 고대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7호로 지정된 '창녕 계성 고분군' 전경. [사진=문화재청]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7호로 지정된 '창녕 계성 고분군' 전경. [사진=문화재청]

사적 제548호 '경주 분황사지(慶州 芬皇寺址)'는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분황사’가 있던 곳이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되었으며,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과 원효(元曉)가 머무르면서 불법을 전파하였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실시한 발굴조사로 보면, 창건 당시 신라 최초의 품(品)자형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세 번의 중건을 거쳐 광해군 원년(1609)에 현재의 금당인 보광전을 조성하였다.

분황사는 황룡사, 흥륜사 등과 함께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왕경(경주)에 조성되었던 칠처가람(七處伽藍)의 하나이며,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 있는 곳이다. 또한, 장기간의 체계적 발굴을 통해 가람의 배치 양상과 그 변화상뿐만 아니라 경역의 대부분을 규명해 낸 사찰이라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사적 제549호 '경주 구황동 원지 유적 일원(慶州 九黃洞 園池 遺蹟 一圓)'은 처음 경주 황룡사지와 관련한 전시관 건립 부지로 선정되어 1999년 시굴조사를 하던 중 통일신라 시대의 석축, 담장, 우물 등의 유적을 확인하고, 2004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원지 유적이다.

원지는 중심부에 크고 작은 인공섬 2개가 있고, 그 주위에 입수로와 배수로, 건물지, 담장, 축대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원지의 조성 시기, 변화상, 공간배치 등을 알 수 있어 통일신라 시대 조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구황동 원지는 동궁과 월지, 용강동 원지에 이어 원지의 조성연대, 규모, 내부구조 등을 확인한 세 번째 신라왕경 원지 유적으로 희소성이 있다.

문화재청은 '창녕 계성 고분군' 등 3건을 경상남도, 경상북도 등과 협력하여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