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으로 1919년 3월 경기도 용인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돼 태형을 받은 홍재택(洪在澤) 선생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포상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이뤄진다.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올해 제100주년 3·1절을 맞아 3·1운동과 학생운동, 의병, 국내·외 항일운동 등으로 조국독립에 기여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333명을 발굴,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을 추서한다.”라고 26일 밝혔다.

「의사삼계원공을사창의유적(義士三戒元公乙巳倡義遺蹟)」,1905년 원용팔 의병장과 함께 의병 봉기를 한 박정수 선생(1859-1917)이 저술한 기록에서 정대억 선생을 원용팔의진의 참모종사로 삼았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자료=국가보훈처]
「의사삼계원공을사창의유적(義士三戒元公乙巳倡義遺蹟)」,1905년 원용팔 의병장과 함께 의병 봉기를 한 박정수 선생(1859-1917)이 저술한 기록에서 정대억 선생을 원용팔의진의 참모종사로 삼았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자료=국가보훈처]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26명(애국장 8, 애족장 18), 건국포장 10명, 대통령표창 297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으며 여성은 75명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100주년 3·1절 정부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각각 수여된다.

정부기념식장에서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는 1908년 강원도 영월에서 정해창 의진에 소속돼 의병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2년을 받은 김현습(건국훈장 애족장, 의병, 남) 선생과 1936년 중국 상해에서 한인애국부인회 간부로, 각종 기념일에 임시정부 의뢰를 받고 기념 전단 인쇄와 배포 등의 활동을 한 안혜순(건국포장, 중국방면, 여) 선생으로, 각각 손·자녀가 서훈을 받을 예정이다.

또한, 1945년 3월 경북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재학 중 독립운동 비밀결사에 참가·활동하다 체포돼 퇴학을 받은 이해진(대통령 표창, 학생운동, 남) 선생과 1919년 4월 경 충남 청양군 운곡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활동하다 체포돼 태형 처분을 받은 명경식(대통령표창, 3·1운동, 남) 선생의 배우자와 자녀가 서훈자로 참석할 예정이다.

제100주년 3·1절 계기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중 체포되어 순국한 의병장 정대억 선생

강원도와 충청북도 일대를 무대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체포, 순국한 정대억(丁大億)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872년 11월 6일 강원도 영월에서 출생하여 1905년 원주에서 원용팔(元容八)(1990, 애국장) 의진의 참모종사로 활동하고 1908년 같은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순국했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의사삼계원공을사창의유적(義士三戒元公乙巳倡義遺蹟)』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사실과 의병관련 탄압 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된다. 여기에 1929년 발간된 『압해정씨(押海丁氏) 족보』에서 1908년 6월 10일 사망한 사실이 추가 확인됨으로써 포상이 이루어졌다. 위의 자료에서는 선생의 자(字)인 경천(敬天, 혹은 景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37세의 나이에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의병항쟁이 얼마나 치열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한독립만세 외치다 태형을 받은 고령의 농민, 홍재택 선생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형을 받은 홍재택(洪在澤)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선생은 50세 고령의 평범한 농민으로 1919년 3월 중순경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태 90도를 받고 고초를 치렀다. 선생의 경우 이미 10년 전에 후손이 포상을 신청하였으나 공적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인 입증자료가 없어 포상이 보류되었다가 경기동부보훈지청에서 용인시 수지구청의 협조를 받아 제출한 『범죄인명부』에서 독립운동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포상이 이루어졌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당시의 3.1운동이 연령 초월하여 전 계층이 참여한 거족적인 투쟁이었음을 보여준다. 용인군 수지면에서는 선생 외에도 윤만쇠(尹萬釗), 이달순(李達淳), 강춘석(姜春錫), 권병선(權丙璇), 김영석(金英石), 정원규(鄭元圭), 이희대(李喜大), 천산옥(千山玉), 진암회(陳岩回), 김원배(金元培), 김현주(金顯周), 남정찬(南廷燦), 최충신(崔忠臣), 이도해(李道海) 선생 등 14분에게 동일한 공적으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포상에 지방자치단체와 지방보훈관서, 국가보훈처가 협업한 사례로서 주목된다.

동아일보 1921년 9월 8일자 기사. 조준묵 선생이 1920년 음력 5월 평남 대동군 시족면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으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징역 7년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자료=국가보훈처]
동아일보 1921년 9월 8일자 기사. 조준묵 선생이 1920년 음력 5월 평남 대동군 시족면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으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징역 7년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자료=국가보훈처]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중형을 받은 조준묵 선생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중형을 받은 조준묵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1년 3월 평안남도 대동군 시족면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의 교통원(交通員)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일제 법정에서 함께 재판을 받은 5명 가운데 형량이 가장 높은 징역 7년의 중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독립청년단은 1919년 음력 8월 평남 대동군 시족면에서 독립운동 원조를 위해 결성된 국민향촌회(國民鄕村會)가 1920년 음력 5월 보다 직접적인 독립운동 단체로 진화한 조직으로 평남 일대에서 크게 활약했다. 신문보도(『매일신보』 1921.5.13)에 따르면, 대한독립청년단 단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5천여 원에 달하는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매일신보』와 『동아일보』(1921.9.8.), 『조선독립운동』(김정명 편, 일제정보문서) 등에서 구체적인 공적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선생과 동일 활동으로 징역 1년을 받은 양제오(楊濟五) 선생이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오랜 기간 국내 외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열혈여성, 장성심 선생

중국과 국내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 장성심(張成心)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06년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1920년 4월 봉산에서 사립 왕성학교(往盛學校) 교사로 재직 중 여자청년회 활동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1921년 중국 남경으로 건너가 1924년 5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 이듬해 상해에서 활동하다 귀국했다. 이후 193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수양동우회 평양반우회 위원, 평양여자소비조합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다 1938년 10월 황해도 봉산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중국 상해로 다시 건너가 1940년까지 흥사단 단원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흥사단사건 검거에 관한 건」(일제 정보문서), 『동아일보』등에서 활동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여성으로서 20년 넘게, 국내와 중국을 넘나들며 조국독립을 위해 활동한 흔치 않은 사례이다.

조명희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조명희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문학으로 독립을 위해 투쟁한 ‘고려인’ 문학의 태두, 조명희 선생

뛰어난 항일문학 창작으로 독립의식을 일깨운 조명희(趙明熙)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894년 충청북도 진천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 1921년 12월 동경에서 친일파를 응징할 목적으로 조직된 의권단(義拳團)에 가입해 활동했다. 귀국 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928년 8월 20만 명 이상의 한인 동포사회가 형성되어 있는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민족신문 『선봉』지 주필, 소비에트 문사동맹 원동관리부 조선인 지도원 등으로 활동하며 시와 소설 창작 등 활발한 문필활동을 펼쳤다. 1920년대부터 1938년 사망 직전까지 국내와 러시아에서 「낙동강」, 「짓밟힌 고려」, 「녀자공격대」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항일 독립의식을 고취했다. 1937년 9월 18일 거주지 하바로프스크에서 ‘일본간첩’ 누명을 쓰고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5월 11일 순국하였다. 1956년 7월 20일 소련 극동주 군법재판소 결정으로 복권되었다. 선생은 문학을 무기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사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한호 선생의 국민대표회의 참가를 알리는 독립신문 기사(1923.1.17). [자료=국가보훈처]
이한호 선생의 국민대표회의 참가를 알리는 독립신문 기사(1923.1.17). [자료=국가보훈처]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과 개혁을 역설한 이한호 선생

만주 북간도에서 3·1운동에 참여한 뒤 상해로 가 독립운동 진영의 개혁과 단결을 위해 노력한 이한호(李漢浩)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895년 함경북도 성진 출신으로 1915년 10월 가족과 함께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이주하였으며, 3월 16일 두도구 현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려다 여의치 못하자 상해로 도항했다. 1922년 1월 현재 상해에서 이동휘(李東輝)(1995, 대통령장)가 이끄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속하여 활동하였으며 동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국민대표회주비회의 독립방안 청취를 위한 연설회의 개최를 발기하고 8월 국민대표회 소집에 지지의사를 밝혔다.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북간도 독립운동 단체인 맹호단(猛虎團) 단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과 명실상부한 독립운동 최고기관 창설을 역설했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학업에 몰두하였고 스위스 취리히대학에서 경제학박사를 받았으며, 광복 후 초대 서독총영사를 거쳐 경제사절단장으로도 활약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일제 정보문서)과 『독립신문』(임시정부 기관지) 등에서 활동 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이번 포상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 포상자는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0,965명, 건국포장 1,280명, 대통령표창 3,266명 등 총 15,511명(여성 432명)이다.

국가보훈처는 “이번 포상은 여성과 학생, 의병과 국내·외 항일운동, 평범한 농민 등 다양한 분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등 관련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발굴,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의와 검증 등을 거쳐 확정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