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우리나라 청자 제작의 시원(始原)이라 일컬어지는 보물 제237호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를 국보로,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에 제작된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와 고려ㆍ조선 시대 금속활자로 찍은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6'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국보로 지정 예고되는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靑磁 ‘淳化四年’銘 壺)'(보물 제237호, 1963년 1월 21일 지정)는 고려 태조를 비롯한 선대 임금들의 제사를 위해 건립한 태묘(太廟)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왕실 제기(祭器)다. 굽 안쪽 바닥면에 돌아가며 ‘순화 4년 계사년 태묘 제1실 향기로서 장인 최길회가 만들었다(淳化四年 癸巳 太廟第一室 享器 匠崔吉會 造)’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이를 통해 993년(고려 성종 12) 태묘 제1실의 향기(享器, 제기)로 쓰기 위해 장인 최길회가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국보 승격 예고된 보물 제237호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사진=문화재청]
국보 승격 예고된 보물 제237호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사진=문화재청]

이 항아리는 문양이 없는 긴 형태로서 입구(口緣)가 넓고 곧게 서 있으며, 몸체는 어깨 부분이 약간 넓은 유선형(流線形)이다. 표면에 미세한 거품이 있으나, 비교적 치밀한 유백색의 점토를 사용하여 바탕흙(태토, 胎土)의 품질이 좋다. 표면에는 은은한 광택과 함께 미세한 빙렬(氷裂)이 있고, 군데군데 긁힌 사용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1989년~1990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황해남도 배천군 원산리 2호 가마터에서 발굴한 ‘순화3년’명 고배(’淳化三年‘銘 高杯)를 비롯해 여러 파편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역시 원산리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태묘의 제기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바닥의 명문 [사진=문화재청]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바닥의 명문 [사진=문화재청]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는 현전하는 초기 청자 가운데에서 드물게 크기가 큰 대형 항아리로 바탕흙(胎土)의 품질이 우수하고 비슷한 형태의 사례가 없는 유일한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그리고 굽 안쪽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제작연도, 기명의 용도와 사용처, 제작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또한, 황해남도 원산리 가마터에서 발굴된 ‘순화’명(‘淳化’銘) 파편들과 비교하여 고려 왕실 제기 생산 가마터를 비롯해 다양한 제작여건이 추가로 밝혀짐으로써, 초기 청자를 대표하는 유일한 편년 자료로서의 가치와 위상이 매우 높다. 우리나라 청자 발달사를 밝히는데 필수적인 유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ㆍ학술적ㆍ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한편, 보물로 지정 예고되는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軍威 麟角寺 出土 供養具 一括)'은 2008년 인각사(麟角寺)의 1호 건물지 동쪽 유구(遺構)에서 발견된 유물로서 금속공예품과 도자류로 구성된 총 18점의 일괄 출토품이다.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 [사진=문화재청]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 [사진=문화재청]

18점의 일괄 출토품 중 ‘금속공예품’은 총 11점으로 금동사자형 병향로(金銅獅子形 柄香爐), 향합(香盒), 정병(淨甁), 청동북(金鼓) 등으로 구성되었다. 사찰에서 사용하는 청동제 의례용품들로서 조형성이 뛰어나고 섬세한 기법이 돋보인다. 특히 불교에서 천상의 새를 상징하는 금동가릉빈가상(金銅迦陵頻伽像)은 그동안 출토 사례가 거의 없어 도상적(圖像的)으로 희귀하며, 청동발(靑銅鉢)과 청동뚜껑 역시 통일신라 시대부터 유행한 전형적인 형태로서 당시 공예기술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청자’ 7점은 모두 당나라 월주(越州)에서 생산된 중국 도자로 추정된다. 발굴 당시 포개진 채 한꺼번에 발견되었고, 함께 출토된 금속유물의 제작 시기 등을 추정하는데 참고가 된다. 청자는 8세기 말~10세기 전반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국내 출토 중국 도자의 편년기준을 제공할 뿐 아니라 국내산 청자 기법을 연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 신라 말에서 고려 초 금속공예품들은 대부분 사찰이나 박물관 등지에서 전해 내려오던 유물인 반면, 인각사 출토 공양구는 보기 드물게 땅속에서 온전히 출토된 것들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보기 드문 금속기명과 청자 유물들이 일괄 출토되어 명확한 출토지와 편년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 청자완 [사진=문화재청]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 청자완 [사진=문화재청]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6(新刊類編歷擧三場文選對策 卷五~六)'은 원(元)나라 유인초(劉仁初)가 원에서 시행한 향시(鄕試)와 회시(會試), 그리고 전시(殿試)의 ‘삼장(三場)’에서 합격한 답안들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1341년 새롭게 편집한 책의 권5와 권6에 해당한다. 총 72권으로 편찬된 이 책에 대해서는 그동안 고려의 전래 기록과 실례가 증명되지 않았으나,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6’이 알려짐에 따라 고려 시대에 유입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대상은 총 72권 중 임집(壬集)에 해당하는 고려본(2권 2책)과 조선본(2권 2책) 권5~6에 해당한다. 모두 금속활자로 인출(印出)하였고 일부 떨어져 나간(缺落) 부분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간행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고려본)'(사진 왼쪽)과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조선본)' [사진=문화재청]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고려본)'(사진 왼쪽)과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조선본)' [사진=문화재청]

고려본은 판심(版心, 옛 책에서 책장의 가운데를 접어서 양면으로 나눌 때 그 접힌 가운데 부분)의 규격 등이 조선본과 다르고, 경의(敬意, 왕과 왕비, 왕실 구성원 등을 높일 때 줄을 바꾸어 기준선보다 한 글자 혹은 두 글자 이상 올려 쓰는 것) 처리법의 적용과 권차(卷次, 고려본의 ‘壬’을 조선본은 ‘任’으로 오기)나 편자(編者, 고려본의 ‘安 成’을 조선본은 ‘成案’으로 도치)의 표기에서 조선본보다 앞선 시기의 특징을 보인다. 조선본의 경우 1403년(태종 3년) 주조된 계미자(癸未字)를 바탕으로 간행되었다. 계미자는 1420년(세종 2년) 경자자(庚子字)를 주조할 때까지 사용된 15세기 대표적인 금속활자이다.

이렇듯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6'의 고려본과 조선본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금속활자의 전승 현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교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사례이다. 아울러 원나라에서 시행된 과시(科試) 답안자료의 국내 유입을 보여주는 유일하게 알려진 자료라는 점에서 보물로서 지정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