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대표 신동학)는 2월 21일 대구 엑스코 오디토리움에서 국채보상운동 '112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행사에는 권영진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 강은희 대구시교육감, 배지숙 대구시의회 의장, 박신한 대구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해 1,00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국채보상운동기록물 기념비 제막, 취지문 낭독, 기념사 및 축사, 주제공연, 축하공연 순서로 진행됐다.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대표 신동학)는 2월 21일 대구 엑스코 오디토리움에서 국채보상운동 '112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사진=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대표 신동학)는 2월 21일 대구 엑스코 오디토리움에서 국채보상운동 '112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사진=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신동학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구한말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맞서 거국적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은 ‘국민되기’를 바탕으로 한 ‘나눔과 책임’의 정신이었다."며,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초의 민간주도 경제독립운동이자 평화적 국권회복운동, 애국계몽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신 대표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가 대대손손 기억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이 식민 통치를 고착화하기 위해 강제로 차관 1,300만 원을 도입하자, 이를 갚기 위해 전 국민이 나선 세계 첫 민간주도 경제자주권 회복 운동이다"며, "국채보상운동의 뜨거운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 운동과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극복과정에서 발현되었다”고 말했다.
 

권영진 대구시장이 국채보상운동 112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권영진 대구시장이 국채보상운동 112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배지숙 대구시의회 의장은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고 물방울이 모여 바다가 된다는 말처럼 국채보상운동은 제국주의에 맞서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든든한 산이 되고 푸른 바다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2017년 10월 30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2,475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하는 국채보상운동기록물 기념비가 제작됐다. [사진=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2017년 10월 30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2,475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하는 국채보상운동기록물 기념비가 제작됐다. [사진=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1904년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借款)을 도입하게 하였다. 1907년 한국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 원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으로 보아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였다.

이에 전국민이 주권 수호운동으로 전개한 것이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다. 1907년 2월 중순, 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은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해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하였다. 발기인은 서상돈을 비롯하여 김광제, 박해령 등 16명으로, 이들은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했다. 

조선 고종 때의 민족운동가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조선 고종 때의 민족운동가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운동은 전 국민의 호응이 이어져 서울에서 김성희·유문상 등이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 각종 신문이 국채보상운동을 홍보하고 후원하였다. 이에 기탁되는 의연금을 보관하고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통합기관의 필요성에 따라 동년 4월 8일 영국인 베델(Ernest Bethell)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하였다.

이 운동이 실시된 이후 1907년 4월 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 5월까지의 보상금액은 230만 원 이상이었다.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대구에서는 남일패물폐지부인회(南一佩物廢止婦人會)·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奪還會)가 결성되어 패물을 보상운동에 의연하였으며, 서울에서는 부인감찬회·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가 결성되어 적극적으로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이 외에도 서울여자교육회·진명부인회·대한부인회·원일부인회 등에서 보상금모집소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부산에서는 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회를 조직하고, 진남포에서는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하여 패물을 모아 보상금으로 내놓았다. 당시 사회계층 가운데 최하류층에 속했던 기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진주애국부인회(晋州愛國婦人會)를 결성하는 등 서울·평양·진주 등지에서도 모금됐다.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여성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으며 운동의 영향이 일본에까지 파급되어 유학중인 800여 명의 유학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였다.

이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을 탄압했다. 1908년 5월, 통감부는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고,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폈다.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국채보상운동은 끝내 좌절되었다.

한편, 지난 2017년 10월 30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2,475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