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민들레가 왜 민들레인줄 아니? 문밖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다고 민들레야~!”

우리말 큰사전을 만들기 위해 위험천만하게 전국 팔도에서 말모이를 하던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이 어린 순희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그에게 이 말을 가르친 것은 그의 아버지 류완택(송영창 분)이었다. 툇마루에 앉아 이 말을 하는 배우 윤계상의 표정이 시렸다.

영화 '말모이'에서 전국 팔도사투리를 모으기 위해 친구, 지인들을 이끌고 오는 김판수(유해진 분). [사진=영화사 시선]
영화 '말모이'에서 전국 팔도사투리를 모으기 위해 친구, 지인들을 이끌고 오는 김판수(유해진 분). [사진=영화사 시선]

누구보다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고 국민을 깨우쳐야 독립한다는 굳은 의지로 자식을 키웠던 아버지가 이제는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다. 중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자기 학교 학생들을 학도병이 되라고 부추겨 전쟁터로 보냈고 결국 창씨개명을 했다.

그때가 1940년대였다. 국민계몽운동에 앞장서던 이광수를 비롯한 문인들이 친일로 돌아섰다. 1910년 국권을 잃고도 1919년 3.1운동, 1920년대 청산리, 봉오동 전투 등에 고무되어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던 이들이 30여 년이 지나자 시류에 편승했다. 마치 반작용처럼 더욱더 강하게 친일행위에 앞장서 독립의지를 꺾었다.

영화 ‘말모이’(감독 엄유나)에서 류정환(윤계상 분)은 존경하던 아버지의 변절을 바라보는 아들이자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우리말 사전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진 청년이었다.

일제는 문화정치라는 허울로 조선 사람들의 정신을 말살하려 했고, 폭력이 안 되면 이간질로 굳건한 독립운동가들의 관계를 파괴했다.

변절하는 동지가 늘 때마다 절망하는 시인 임동익(우현 분), 형무소에 갇힌 아내를 살리고 싶은 막내 민우철(민진웅 분), 훗날 우리 상고사와 철학이 담긴 ‘부도지’를 전달한 ‘한글’잡지 기자 박훈(김태훈 분), 문당책방의 주인으로 모두를 다독이며 이끌던 구자영(김선영 분), 진정한 어른의 넉넉한 품과 불굴의 정신을 보여준 조갑윤(김홍파 분), 그리고 적당히 세상에 맞춰 살던 의리파 까막눈 김판수(유해진 분)가 그 엄혹한 시절을 지나왔다.

그 시절을 우리말 사전에 대한 일념하나로 버티며 냉정한 눈빛과 가슴으로 살던 류정환(윤계상 분)의 가슴을 사르르 봄처럼 풀리게 한 것은 김판수(유해진 분)의 어린 딸 순희였다. 우리말을 지켜야할 가장 큰 이유가 다음 세대인 것이다.

의리와 눈치하나로 세상을 살던 김판수(유해진 분)가 사환노릇을 위해 한글을 배우는 과정을 거쳐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하는 이로 바뀌었다. 말과 글이 가진 힘이고,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이들의 선택이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 각지에서 온 국어선생님들과 표준어를 정하는 작업을 하는 조선어학회 대회 류정환(윤계상 분, 가운데)과 박훈 기자(김태훈 분, 오른쪽), 토의사항을 받아 적는 시인 임동익(우현 분, 왼쪽).  [사진=영화사 시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 각지에서 온 국어선생님들과 표준어를 정하는 작업을 하는 조선어학회 대회 류정환(윤계상 분, 가운데)과 박훈 기자(김태훈 분, 오른쪽), 토의사항을 받아 적는 시인 임동익(우현 분, 왼쪽). [사진=영화사 시선]

영화에서 극장에 모여 전국 사투리를 포함해 모두를 올려놓고, 표준어를 정하기 위해 몇날 며칠을 토의하던 그들의 모습은 고지식해보이지만, 얼마나 치열하게 지켜낸 우리말, 우리글인지 새삼 그 가치를 느끼게 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화면에 흐르는 ‘제국주의로 인해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들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나라는 자국의 말과 글을 거의 완전하게 회복한 유일한 나라’라는 자막은 그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큰 선물을 받았는지 크게 다가왔다.

해방 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된 말모이 자료를 통해 우리말큰사전을 만들 수 있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말모이'는 105인 사건, 주시경 선생 등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한글운동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