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박열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박인원) 주관으로 제45주기 박열(朴烈)의사 추모제가 1월 17일 경북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1층에서 거행되었다.  추모제에는 허정열 문경부시장, 김인호 문경시의회의장, 엄재엽 문경시교육장, 김상출 경북북부보훈지청장, 한현근 문경시문화원 원장을 비롯한 180여명의 시민이 참석하였다. 추모제는 개회사, 약력소개, 의사 약력 소개, 추모사, 헌화·분향, 폐식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사)박열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제45주기 박열(朴烈)의사 추모제가 1월 17일 경북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1층에서 거행되었다. [사진=박열의사기념사업회]
(사)박열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제45주기 박열(朴烈)의사 추모제가 1월 17일 경북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1층에서 거행되었다. [사진=박열의사기념사업회]

허정열 문경부시장은 추모사에서 “우리들은 의기를 품고 일본제국주의에 당당히 맞선 박열의사의 혼백을 위로하고 그 위업을 기리고자 이 자리에 모였다"며, "투혼을 불태우며 고난의 길을 걸으셨던 박열의사의 불굴의 의지는 우리 민족에게 자주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었고, 전 세계 약소국가들에게 독립의지를 일깨우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선생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민족의 자존을 지킬 수 있었으며, 조국 광복을 쟁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허정열 문경부시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박열의사기념사업회]
허정열 문경부시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박열의사기념사업회]

이후 박열의사의 모교인 함창초등학교에서 어린 후배들이 선배의 애국정신을 본받고자 추모헌시를 낭독했다. 

박열(1902~1974) 의사(義士)는 1902년 3월 12일 경북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전통적인 양반 가문으로 지방 사민(士民)이었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자작농업과 소작료 수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궁핍하였다. 7세인 1908년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0세 때에는 함창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그 당시 민족의식이 뚜렷한 조선인 선생님으로부터 조선역사의 존엄성을 배워 선생은 민족의식 형성에 큰 계기를 갖게 됐다. 

이후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전신) 사범과에 진학하였으나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생은 고향 문경에서 1919년 만세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탄압 만행을 목격하고는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1919년 10월, 도쿄에 도착한 선생은 신문배달과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등의 노동에 종사하며 학업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좀더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김찬, 조봉암 등 도쿄에 거주하는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을 조직하였다. 또한 도쿄의 최대 조선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김약수, 백무, 최갑춘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였다. 나아가 오스기 사카에, 사카이 토시히코, 이와사 사쿠타로 등 당시의 저명한 일본 사회주의자들을 찾아가 직접 교류하기도 했다. 1921년 11월 29일 도쿄 고학생 동우회와 혈권단 등으로 항일활동을 펼치던 선생은 김약수, 원종린 등 유학생들과 함께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했다. 

1922년 2월, 선생은 평생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를 처음 만났다. 가네코 후미코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제국주의 일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받아오면서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자유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사상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함께 항일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아내 후미코와 흑도회의 기관지인 '흑도'를 발간하고 항일세력의 규합과 선전활동에 전념하였다. 흑도회는 일본 내에서 벌어지는 조선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노동착취와 학대를 조사하고 발표하였다. 

1922년 독립운동에 몸 담고 있던 박열 선생은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사진은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선생. [사진=독립기념관]
1922년 독립운동에 몸 담고 있던 박열 선생은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사진은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선생. [사진=독립기념관]

 

그 결과,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들을 비롯해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이는 등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선생은 이 사건과 같은 반인도적 행위가 민족차별과 식민체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이의 근본적인 파괴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1922년 12월경 선생은 직접 행동을 추구하는 회원들로 구성된 흑우회를 조직하였다.   

흑우회는 일본 및 조선의 여러 사회단체들과 함께 연대활동을 전개하였다. 흑우회원들은 '후데이센징(太い鮮人)'과 '현사회(現社會)'라는 기관지를 통해 ‘과격사회운동 취체법안’에 반대의견을 개진하고 대규모 연합시위에 참여하였다. 또 일본 노동단체 주최로 열린 세계노동절 행사에 참가해 ‘8시간 노동제 실시’와 ‘조선의 해방’을 외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또한 조선문제강연회를 열어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서울과 도쿄의 노동단체들과 연락, 관계를 맺는 등 활발한 대외 연대활동을 펼쳤다. 

1923년 4월, 선생은 흑우회와 별도로 '불령사'를 조직하였다. 가을 경에 일본 왕세자 결혼식 소식을 접한 선생은 '불령사' 조직원들과 거사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폭탄 반입이 번번히 실패했다. 그러던 중 9월 1일 돌연 관동대지진이 발생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일본내각과 군부는 이 기회를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악용하였다. 정부의 고의적인 유언비어 살포로 인해 자경단과 일본인 민중조차 이 광란의 대학살에 참여하였다. 오스기 사카에를 비롯한 일부 노동조합 간부들과  6천여 명의 조선인이 무참히 희생당했고,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 그리고 불령사 회원들을 포함한 6천여 명이 피체되었다.

박열 선생(1902~1974)의 생전 모습. [사진=독립기념관]
박열 선생(1902~1974)의 생전 모습. [사진=독립기념관]

일본경찰은 취조 도중 박열 선생의 폭탄구입계획 사실을 알아냈고,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를 일왕 암살을 꾀한 '대역사건'의 범죄자로 검찰에 기소하였다. 이후 1923년 10월부터 1925년 6월까지 이뤄진 공판에서 선생은 당당히 일왕의 죄를 폭로하며 법정 투쟁을 벌였다. 일본정부는 1926년 3월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판결 후에 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 하였고, 부인 가네코 후미코는 사면장을 갈갈이 찢어 버렸다. 일주일 후 뜻밖에 선생과 후미코의 형량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특별 감형되었고, 선생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되어 석방되기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 갇혀 보냈다. 

일제는 선생에게 꾸준히 전향공작을 펼쳤지만 선생의 기상과 정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 1945년 10월 27일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다(秋田)형무소에서 석방된 선생은 1946년 1월 20일 신조선건국동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선생은 1946년 5월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아 항일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의 형무소 뒷자리에 쓸쓸히 버려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열사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신조선건국동맹은 1946년 10월 3일 김구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우파 단체들과 통합하여 재일조선거류민단(이하 민단)을 발족했다. 이후 선생은 단장직에서 물러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초대된 것을 계기로 영구 귀국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선생은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72세를 일기로 영면하였고, 그 해 2월 남한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회가 열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