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수) 오전 11시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三義士) 묘전에서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회장 황길수) 주관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제86주기 추모제'가 4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추모제는 개회사, 약전 봉독, 추모식사, 추모사, 헌화·분향, 윤봉길의사 유시증정, 추모가, 조총 묵념, 유족대표 인사, 폐식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추모식에는 표창원, 김정우, 김규환 국회의원,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한 선열단체 대표와 회원, 시민 등이 참석했다. 

12월 19일(수) 오전 11시 효창공원 삼의사(三義士) 묘전에서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회장 황길수) 주관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제86주기 추모제'가 4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사진=문현진 기자]
12월 19일(수) 오전 11시 효창공원 삼의사(三義士) 묘전에서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회장 황길수) 주관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제86주기 추모제'가 4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사진=문현진 기자]

황길수 기념사업회장은 추모식사에서 “일제 침략의 암울한 시기에 민족의 큰 횃불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신 겨레의 스승이신 윤 의사의 숭고한 애국혼을 기린다.”며, “일제식민지배의 두꺼운 벽을 절감한 윤 의사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출사표를 쓰고 부모·형제·애처·애자·고향산촌을 버리고 23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했다.”고 말했다. 황 회장은 "그 모질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조국과 겨레를 위한 강의한 사랑의 길을 걸으셨다.”고 추모했다.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추모사에서 “조국광복의 대의를 위하여 25년의 짧지만 강렬했던 삶을 사신 윤 의사에게 존경과 추모의 뜻을 받친다.”며, “지난 세기 초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많은 애국 선열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쳤다. 이렇듯 순국의 길을 걸은 애국지사들 중에서도 윤 의사는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조국 광복의 초석을 놓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밝혔다.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어서 광복회 박유철 회장의 추모사를 나중화 광복회 부회장이 대독했다. "나라 잃은 백성의 비애를 온 몸으로 느끼며,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결코 살아돌아 오지 않겠다고 비장한 각오로 중국으로 떠난 윤 의사였다."며, "1932년 4월 29일, 윤 의사는 의거를 통해 일본제국주의 수뇌부 시라카와 육군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을 처단하고, 노무라 중장을 실명케 하는 등 주춤하던 항일독립운동에 구심점을 세웠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고인을 기리는 뜻을 담아 윤봉길 의사의 영전에 헌화하고 분향하였다. 해군 윤봉길함장 박순식 대령은 잠수함 윤봉길함의 사진이 담긴 대형액자를 기념사업회에 증정하였다. 황길수 기념사업회장은 윤 의사 유시를 박순식 대령에게 증정했다.  

해군 윤봉길함장 박순식 대령은 잠수함 윤봉길함의 사진이 담긴 대형액자를 기념사업회에 증정하였고, 황길수 기념사업회장은 윤 의사 유시를 박순식 대령에게 증정했다. [사진=문현진 기자]
해군 윤봉길함장 박순식 대령은 잠수함 윤봉길함의 사진이 담긴 대형액자를 기념사업회에 증정하였고, 황길수 기념사업회장은 윤 의사 유시를 박순식 대령에게 증정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날 추모식에 참가한 한 시민은 “윤봉길이라는 의사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며, "그 분의 뜻이 끊이지 않게 우리가 무엇이든지 잘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매헌(梅軒) 윤봉길(1908~1932) 의사(義士)는 매죽헌 성삼문, 만해 한용운, 백야 김좌진, 추사 김정희, 자암 김구, 아계 이산해, 정헌 이가환 등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1908년 6월 21일 출생했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 선생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후 1926년 그의 나이 19세 때, 무식이 나라를 잃게 한다는 생각에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윤 의사는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며,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계몽, 농촌개혁 운동의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윤봉길 의사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운동이 결국 민족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윤 의사는 일제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행동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심에 따라, 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1931년 윤 의사는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했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에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접했다.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윤 의사와 김구 선생은 의거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때, 윤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하고 가입한다. “나는 적성(赤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의거에 앞서,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독립기념관]
매헌 윤봉길 의사는 의거에 앞서,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독립기념관]

드디어 의거 당일인 4월 29일 수많은 인파 속에서 전승 축하식이 시작되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에 의사는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한 단상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라카와의 면전에서 폭발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일본육군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었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 의사의 의거는 곧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했다. 이 의거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거사 직후 일본군에 피체된 윤 의사는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며,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에도 윤 의사는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가 15세 때 쓴 '학행'이라는 한시는 윤 의사의 인생을 예고한 것과 진배없었다. 자신이 쓴 시처럼 진정한 참선비의 모습으로 당면한 시대에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윤 의사가 순국한 12월 19일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후손들은 그의 영전에 고개 숙여 헌화했다.  

학행(學行)
불후성명 사기명(不朽聲名 士氣明) 길이 드리울 그 이름 선비의 기개 밝고
사기명명 만고청(士氣明明 萬古晴) 선비의 기개 밝고 맑아 만고에 빛나리
만고청심 도재학(萬古晴心 都在學) 만고에 빛나는 마음 학문에서 우러나며
도재학행 불후성(都在學行 不朽聲) 부지런히 쌓아 그 명성 스러짐이 없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