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르성당. 수채화.  장영주 작. [사진=장영주]
오베르성당. 수채화. 장영주 작. [사진=장영주]

네덜란드 출신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는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를 소망하였다. 성직자를 'Sky Pilot'이라고도 하니 중생을 하늘로 인도하는 사명을 받고자 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아를에서의 ‘해바라기’ 연작과 평생 존경했던 밀레의 작품인 '씨 뿌리는 사람'을 따라 그린 작품에서 보듯 고흐만의 태양이 그의 가슴에서 이글거리고 있다. 그도 모자란 듯 밤하늘의 주먹만 한 별빛도 휘황찬란하게 번쩍인다. 하늘의 빛에 닿아 그의 전 존재가 환하게 물들고 싶은 것이리라.

그러나 '감자를 먹는 사람들'에서 보듯 초창기의 작품은 어둡기 그지없다. '슬픔(Sorrow)'이라는 드로잉에서는 삶을 대놓고 외롭고 비극적으로 보고 있다. 다섯 살 연장자인 고갱과의 공동생활 중 다툼으로 자기 손으로 귀를 자른다. 붕대를 감은 자화상에서 보듯 모두를 내려놓은 듯한 표정은 내 젊은 가슴을 늘 저리게 하였다. 그로부터 한 해 뒤, '까마귀 나는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살한다. 평생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 또한 병으로 급사한다. 그의 비극과 영광을 찾아 '오베르 쉬즈 우아즈'를 향해 버스에 오른다.

달리는 버스에서 추억이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내 나이 삼십 대 초반. 대책 없이 고등학교 미술 교사직을 내던져 버렸다. 그림만 그릴 수 있는 전업 화가의 때깔 좋은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순서를 두고 전략을 세웠는데 그 첫째가 파리로 기약 없는 그림 유학을 하러 가는 것이었다. 콩 놓고 팥 놓고, 희망에 부푼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방으로 조여 오는 생활의 압박은 무직인 전직 미술 교사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홀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병들어 눕자 아내는 호구를 위해 마련한 구멍가게를 몇 달 만에 치워버린다. 이불을 치우면 화실이요 펼치면 침실이 되는 노량진 달동네의 습기 차고 껌껌한 지하 방에서 다섯 식구가 생존하고 있었다. 국전에서 일곱 번 탈락해도, 아내가 굶어도 언젠가는 파리로 유학 간다는 꿈을 불태우며 견뎌내고 있었다. 그만큼 파리는 내가 반드시 건너야 할 루비콘강이었다.

도무지 서러워서

버스는 13번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고 나의 상념은 계속된다. 파리는 언제나 화염의 강이었고 다시 돌아오고 말고는 생각조차 없었다. 파리로의 유학을 접고 나서는 하루하루 몰아치는 생활의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오랜만에 인천 팔미도로 스케치를 하러 간다. 고깃배를 얻어 타고 바다로 나가 스케치북을 펼치니 수평선이 손짓하듯 꿈틀꿈틀 나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다. 온 몸이 축축하고 무거워 눈을 뜨니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내려다보고 있다. 바다로 뛰어든 나를 건져 놓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펴보던 중이었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을 배에 태웠다 졸지에 자살방조죄를 뒤집어쓸 번 한 선장에게 뺨을 얻어맞았다. 그리고 열심히 살라는 충고와 위로를 듣고 돌아오는 길에 한가위를 향하는 달이 떠 있다.

서러웠다. 도무지 서러웠다. 알 길 없는 이 삶이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 이런저런 소동 끝에 '서해'라는 작품으로 목우회 공모전에서 대상을 타고 차츰 절망의 늪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하지만 내게 그림은 사다리와 같이 기항지일 뿐 '깨달음'이란 목표지점은 아니었다.

어느 새 칠십 살을 넘겨 처음으로 프랑스를 만나러 왔다. 아직도 내 가슴의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버스의 속도가 줄어들더니 좁은 시골길로 접어든다. 고흐가 마지막 두 달을 기거한 '오베르 쉬즈 우아즈' 마을로 향한다.

권총소리

'오베르 쉬즈 우아즈'는 세느강 주변의 작은 촌락이다. 주민을 다 합쳐도 매일 고흐를 만나러 오는 관광객보다 많지 않을 듯한 동네이다. 당시는 더욱 이름 없고 한적한 곳이었을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언덕으로 10여 분 올라가니 왼쪽 귀퉁이에 오베르 성당이 나온다. 작고 평범한 시골 성당인데다가 마침 수리 중이다. 화가의 마술인가 특권인가? 힘찬 붓놀림과 강렬한 색의 대비로 웅장하게 보이는 고흐 작품 속의 '오베르 성당'과는 딴판이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재빨리 스케치했다. 그사이 멀어져 가는 일행의 꼬리를 따라잡는다. 작은 언덕으로 이어진 황토와 초록 풀섶이 섞인 농로를 오르니 추수를 기다리는 누런 옥수수밭이 펼쳐진다. 128년 전 여름날, 고흐가 삶의 무게 같은 화구를 짊어지고 오르고 내린 길이다. 곧 네 갈래 길이 나오고 이미 추수가 끝난 바로 그 '까마귀 나는 밀밭'은 텅 비어 황량하다. 고흐는 천재라고 하기에는 결이 좀 다르다. 지독한 노력가로 하늘의 재능을 끌어 온 화가로 생각된다. 그의 생을 보면 자신도 포로가 된 끝없는 격정의 용솟음과 고통을 함께 느낀다. 스케치하는 내내 나의 가슴도 찢어지듯 아파졌다. 푯말에는 그의 말이 씌어 있다.
"나는 슬픔과 극한의 고독에 적합한 장소를 발견하였다." 검은 까마귀들이 나는 그림을 완성하고 고흐는 자신에게 권총을 발사하였다. 그 권총 소리는 고흐의 삶을 마치는 조종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향한 인간의 열정과 자유의지를 여는 예포가 되었다.

까마귀 나는 밀밭. 수채화. 장영주 작. [사진=장영주]
까마귀 나는 밀밭. 수채화. 장영주 작. [사진=장영주]

Starry Starry night.(별이 빛나는 밤에)
돈 맥크린의 '빈센트'라는 노래는 빈센트 반 고흐를 기리는 노래이다.

"빈센트, 이 세상은 당신같이 아름다운 이가 있을 곳이 못 돼" 라는 가사가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이다.

과연 그럴까? 너무 아쉬운 나머지 나온 탄식이겠지 하면서도 그의 광기 서린 필체와 색감이 주는 일탈의 자유를 떠올리게 된다. 그가 묻힌 '오베르 쉬스 우아즈' 마을에서는 정작 고흐를 잘 모르고 '고그'라고 해야 겨우 알아듣는다고 한다. 모네, 로댕, 피카소, 세잔 등에 비하면 그의 생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외롭다. 번쩍이는 헬멧을 쓴 산악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탄 청년들이 굉음을 내며 고흐의 마지막 밀밭 길을 내달린다. 버스가 서너 대씩 들이닥쳐 돌아보고 곧 사라진다. 그 흔한 기념관도 책방도 기념품 가게도 없다. 수십 명의 직원이 상근하는 다른 화가들의 뮤지엄과는 매우 다른 풍경이다. 외로워서 오히려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 고흐이다.

'별'은 지방에 따라 '빌'이라고도 한다. 천지신명께 소망을 '빌'고 척을 진 사람에게 '빌'어 용서를 구하는 것은 '별'처럼 광명한 존재가 되기 위한 행동이다. 고흐는 밝은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해바라기'처럼 햇빛에서의 사물을 주로 그린 뒤에는 밤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다. 특히 밤하늘의 쏟아질 듯 빛나는 별 풍경을 많이 그린다. 그에게는 태양이나 별이나 구분이 없는 광명체가 되었다. 그의 깊은 마음이 간절하게 빛을 갈구하게 되었다.

"빛나서 외롭고,
외로워서 빛나는 별.

빛 그늘로 서로를 비추고
물결 위에 떠서
기쁨으로 몸을 떤다.
고흐,
이 세상은
당신이 살아 빛나기에
썩 알맞게 준비된
훈련장이야."

조선에도 고흐가

고흐는 한때 고갱과의 공동생활을 꿈꾸었다. 완벽한 캐미와 브로맨스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고흐와 고갱은 여러모로 달랐다. 고흐는 너무 격정적이어서 전도사직에서도 쫓겨났지만 고갱은 파리의 잘 나가는 주식 중개인이었다. 고흐는 작품에 감정을 쏟아 부었기에 훗날 야수파와 표현파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고갱은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장식적인 면을 가미하였다. 훗날 '보나르' 등 '나비(Nabis)'파와 20세기 회화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고흐가 자신의 격정에 의해 서서히 무너져가던 어느 날, 고갱을 죽이려다가 자신의 귀를 자른다.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다. 그런데도 언제, 어디서나 붓을 손에서 놓지 않고 걸작을 창조한 것이 그의 위대함이다.

조선에도 비슷한 화가가 있었다. 무주 출신의 최북(崔北 1720~1769? )이다. 붓 한 자루로 살아간다는 '호생관', 이름을 풀어 쓴 ‘칠칠(七七)’이라고 자신의 호를 지었다. 산수화를 잘 그려서 '최 산수', 메추라기도 잘 그려서 '최 메추리'라고 불렸다. 도화서 출신은 아니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1747년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온다. 조선 화가와 사대부들이 중국풍 산수화를 좋아하는 세태에 “조선 사람은 마땅히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고 꾸짖는다.

명승지를 주유하면서 현장의 산수를 그리고 술 마시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금강산 구룡연에 이르러 경치와 술에 크게 취하여 "천하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 마땅하다."며 투신한다. 어느 권세가가 강압적으로 작품을 요구하자 "남이 나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를 저버린 것이다."며 송곳으로 자신의 눈을 찔러 평생 애꾸가 된다. 고흐는 정신이 쇠약한 가운데 귀를 잘랐으나 최북은 온전한 상태에서 스스로 눈을 찔러 멀게 한 것이다. 그것도 화가의 눈을.
어떤 날 모처럼 작품이 팔리자 대취하여 귀가하다가 눈 속에서 얼어 죽으니 칠칠은 49세였다. 영정조시대의 문신 신관하는 '최북가'를 지어 그를 칭송하였다. “(전략) 아! 최북이여, 몸은 비록 얼어 죽었으나 그 이름은 길이 지워지지 않으리.”

대담한 파격과 조형 양식으로 조선 후기 회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장승업, 김명국과 더불어 조선의 3대 기인화가로 꼽힌다. 고흐에게 'starry starry night'가 있다면 최북에게는 '최북가'가 있다. 모두 자유를 향한 행진곡이다. 살고 싶은 대로만 살아간 최북은 두 눈을 가진 자들보다 더욱 일목요연하게 자신의 자유를 그려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