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회장 홍일식)는 지난 17일, 서울 중구 상동교회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 순국 86주기 추모식’을 개최했다. 추모식에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서양호 중구청장 등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후손 250여 명이 참석했다.
 

지난 17일, 우당 이회영 선생 순국 86주기 추모식이 서울 중구 상동교회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서양호 중구청장 등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후손 25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사)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지난 17일, 우당 이회영 선생 순국 86주기 추모식이 서울 중구 상동교회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서양호 중구청장 등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후손 25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이날 행사는 1부 추모예식을 시작으로, 2부 추모식과 우당장학회 장학금 수여식이 전개되었다.

이날 추모식에서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추모사를 통해 “우당 이회영 선생은 당대 명문가 출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부와 지위를 모두 포기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한 풍찬노숙의 길을 걸으셨다.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의 제단에 바쳐 조국 광복의 대의를 쟁취하고자 하셨던 이회영 선생의 영전에 삼가 고개 숙여 추모와 존경의 뜻을 바친다.”고 말했다.

박유철 광복회장은 나중화 광복회 부회장이 대독한 추모사를 통해 “선생께서는 우리 민족의 밝은 미래를 내다보시고,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정리해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셨다. 오늘 우당 이회영 선생의 서거 86주기 추모일을 맞이하여, 지난날 절박한 상황에서도 넉넉한 인품을 보여준 우당 선생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갖는다.”고 전했다.

서양호 서울특별시 중구청장은 “우당 선생은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강압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 국민들에게 불굴의 독립의지와 광복의 희망을 심어준 애국자이자 혁명가이셨다. 선생의 애국충정에 한없는 존경을 표하며, 충혼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빈다.”고 추모사를 밝혔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나중화 광복회 부회장, 서양호 서울 중구청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오른쪽 하단)2018년 우당장학회 장학생으로 선정된 차상현 군이 이회영 선생께 드리는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사)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나중화 광복회 부회장, 서양호 서울 중구청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오른쪽 하단)2018년 우당장학회 장학생으로 선정된 차상현 군이 이회영 선생께 드리는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한편, 광복회의 추천으로 2018년 우당장학생에 선정된 배재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차상현 군은 이날 우당 이회영 선생에게 드리는 편지를 낭독했다. 우당장학회는 차 군 외에 23명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1867년 서울 저동(현 명동 YWCA자리)에서 당시 이조판서 이유승(李裕承)의 4남으로 태어났다. 1888년에는 저동의 이웃이었던 이상설과 자신의 아우 이시영, 그리고 여준, 이강연, 이범세, 서만순 등과 더불어 서양의 정치, 경제, 법률 그리고 동서양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 영정. [사진=(사)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우당 이회영 선생 영정. [사진=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이후 1906년, 상동교회 지하에서 전덕기 목사, 이동녕, 양기탁과 함께 최초의 독립운동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발족한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을 정사로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하여 대표단을 파견할 수 있게 고종황제에게 주청했다. 당시 일제의 압력으로 회의 참석에는 실패했지만,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 여론에 알렸다.

1910년 8월, 나라가 경술국치를 국권을 잃자, 재산을 정리하여 6형제 40여 명의 가족을 인솔하고 만주 유하현으로 망명한다. 이듬해에는 길림성 삼원보 추가가에서 군중대회의 결의에 따라 '경학사'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개교한다. 1912년에는 당시 위안 스카이(袁世凱) 총통의 도움을 받아 통화현 합니하로 학교를 이전해,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했다. 한편, 신흥무관학교는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이 설립한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으로 계승된다.

이후 1919년 4월, 이동녕, 이시영과 함께 상해로 이동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의정원 의원으로 뽑혔고,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의정원 평의원으로서 정부수립 기초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서 자리다툼과 분파작용으로 독립운동 역량이 약화됨을 보고 북경으로 귀환했다.

1921년에는 김창숙, 신채호와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자유공동체사회’ 추진 운동을 전개한다. 이듬해, 이을규, 이정규, 유자명 등과 함께 러시아의 맹인 시인이자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인 에루생코 등과 함께 아나키스트 운동을 개시한다. 이후 1923년 아나키스트 운동의 목표인 자유협동사회 건설을 위해 이을규, 이정규와 함께 중국 호남성 한수현 양도촌에 이상 마을 설립을 추진한다.

이후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아나키스트 동료들인 정화암, 백정기, 김성수 그리고 중국인 왕아초, 화균실, 일본 아나키스트 전화민, 오수민 등 7명과 함께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비밀행동조직인 '흑색공포단'을 조직한다. 흑색공포단의 일원이었던 천리방,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유기문 등은 중국국민당의 친일 그룹인 왕정위를 암살하려 했다가 그의 부관을 사살했으며, 아모이(샤먼) 일본영사관을 폭파했다.

이듬해에도 흑색공포단의 활약은 계속됐다. 1월, 천진(톈진)부두에 일본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폭파했으며, 천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했다. 같은 해 11월, 요녕민중자위군 총사령 당취오과 양세봉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 간의 협조체제를 구축하고자, 요녕성으로 들어가다 다롄에서 잠입 중 상해 밀정에게 정보가 누설되어 일경에 체포되었다. 결국 그해 11월 17일, 우당 선생은 여순 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고 만다.

대한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우당 선생은 1962년 3.1절, 순국 30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 훈장 단장에 추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