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진을 향해 대완포구(大碗砲口)로 발사하니 500~600보를 날아가 떨어지는데, 얼마 있다가 화약이 폭발한다.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간다. 영화에서 보는 이런 장면은 바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쏘았을 때 모습이다.

비격진천뢰는 조선 선조(宣祖) 때 군기시(軍器寺)의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만들었다. 화약, 철편(鐵片), 뇌관을 속에 넣고 겉을 쇠로 박처럼 둥글게 싸서 대완구(大腕砲口)라는 화포에 장전하여 쏘아 목적지에 투하한다. 즉 목표물에 날아가서 천둥번개와 같은 굉음과 섬광, 수많은 파편을 쏟아내면서 폭발하는 작렬(炸裂) 시한폭탄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 25년(1592)년 9월 초 박진(朴晋)이 경주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여 경주를 수복했다.

비격진천뢰가 출토된 현장 모습. 사적 제346호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에서 조선 시대 훈련청과 군기고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또한, 화약 무기인 비격진천뢰 11점, 자기류, 기와류도 함께 출토되었다. [사진=호남문화재연구원]
비격진천뢰가 출토된 현장 모습. 사적 제346호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에서 조선 시대 훈련청과 군기고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또한, 화약 무기인 비격진천뢰 11점, 자기류, 기와류도 함께 출토되었다. [사진=호남문화재연구원]

2003년에 창녕 화왕산성에서 발굴된 비격진천뢰(국립진주박물관 소장), 창경궁에 보존되어 왔던 비격진천뢰(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보물 제860호)와 경남 하동 고성지(古城址)에서 발굴된 유물, 진주성지에서 발굴된 비격진천뢰 파편, 전남 장성군 석마리에서 발굴된 비격진천뢰(연세대박물관 소장) 등 현재까지 보고된 비격진천뢰는 모두 6점에 불과하다.

이 비격진천뢰가 이번에 대거 발굴됐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의 허가를 받아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윤덕향)이 발굴조사 중인 사적 제346호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에서 조선 시대 훈련청과 군기고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또한, 화약 무기인 비격진천뢰 11점, 자기류, 기와류도 함께 출토되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훈련청과 군기고로 추정되는 건물지를 비롯하여 10여동의 건물지와 수혈(竪穴, 구덩이), 도로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1호 수혈에서는 조선 시대에 발명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한폭탄이라고 할 수 있는 비격진천뢰가 출토되었으며, 바로 인접하여 포대(砲臺) 시설도 확인되었다.

군기고 추정 건물지 전경. [사진=호남문화재연구원]
군기고 추정 건물지 전경. [사진=호남문화재연구원]

비격진천뢰은 모두 11점으로 비교적 온전한 상태이며, 크기는 지름 21㎝, 무게 17~18㎏ 정도로 비슷한 상태다. 현 이번에 발견된 11점은 그 수가 상당히 많고, 새롭게 출토된 점에서 주목된다.

비격진천뢰가 나온 구덩이 주변에서는 포사격 시설로 추정되는 포대(砲臺)가 조사되었다. 평면이 원형형태로 규모는 지름 170㎝이다. 돌을 편평하게 깔아 견고하게 만든 후 흙을 다져 바닥면을 마련하였다. 또한, 포의 거치대로 추정되는 2개의 기둥구멍이 포대 남쪽에서 확인되었다.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현장. [사진=호남문화재연구원]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현장. [사진=호남문화재연구원]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태종 17년(1417)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되었다. 조선 시대 읍성 가운데 제작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진 읍성으로, 행정과 군사의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발굴조사는 고창군(군수 유기상)에서 2003년 복원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한 후 연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건물지와 시설물, 성벽, 문지, 해자(垓子) 등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성과와 고지형 분석을 바탕으로 읍취루, 동헌의 담장과 삼문, 연지(蓮池, 연못)와 정자 등이 복원되었으며, 북·서벽의 정비 등도 꾸준히 시행 중이다.

호남문화재연구원은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이 왜구의 방어를 위해 축성된 점으로 보아, 훈련청‧군기고 등 건물지, 비격진천뢰와 포대시설 등은 무장읍성의 군사적인 성격을 고고학으로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