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운문양목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최재학)와 태안반도남면청년회(회장 이재용) 주관으로 우운 문양목(文讓穆, 1869∼1940) 선생 제14회 추모제가 11월 11일(일) 충남 태안군 문양목선생 생가지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추모제에는 가세로 태안군수와 박종덕 충남서부보훈지청장, 남평문씨 종친회를 비롯한 시민 16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제는 개회사, 약력소개, 추모사, 헌화·분향, 폐식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우운문양목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최재학)와 태안반도남면청년회(회장 이재용) 주관으로 우운 문양목(文讓穆, 1869∼1940) 선생 제14회 추모제가 11월 11일(일) 충남 태안군 문양목선생 생가지에서 거행되었다. [사진=태안군청]
우운문양목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최재학)와 태안반도남면청년회(회장 이재용) 주관으로 우운 문양목(文讓穆, 1869∼1940) 선생 제14회 추모제가 11월 11일(일) 충남 태안군 문양목선생 생가지에서 거행되었다. [사진=태안군청]

 우운문양목선생 기념사업회 최재학 회장은 추모사에서 "우운 문양목 선생은 적빈한 생활 속에서도 조국 독립과 한인들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며,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대동보국회를 결성하고 대동공보라는 신문을 통해 일제의 부당함과 만행을 널리 알렸으며, 1908년 3월 당시 한국정부의 외부고문이던 스티븐스(Stevens, D.W.)가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보호정치를 찬양하며 한국인은 독립할 능력이 없다고 하자 그를 처단하기 위해 의기투합했다."고 말했다.  

충남서부보훈지청 박종덕 청장은 "1907년 하와이로 피신한 후부터 1940년 서거할 때까지 일평생 오로지 독립운동에만 전념하신 우운 선생의 공훈을 기린다."며, "선생이 신념을 갖고 노력한 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숭고한 뜻을 후세들이 영원토록 간직해야 한다."고 추모했다. 

제 14회 우운문양목선생추모제에서 참가자들이 영전에 묵념하고 있다. [사진=태안군청]
제 14회 우운문양목선생추모제에서 참가자들이 영전에 묵념하고 있다. [사진=태안군청]

충선공 문익점의 18세손인 우운 문양목 선생은 1869년 6월 7일 충남 서산군 남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출중하였던 선생은 향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던 중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의 부패함을 개탄하여 남평 문씨 문중 사람들과 함께 동학혁명군으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대대적인 동학군 진압작전을 계기로 관군에 피체되는 상태에 놓였다. 하지만 관군에 가담하였던 서당 친구를 만나 친구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였다.   

탈출 후 선생은 1903년 경기도 인천으로 피신한 뒤 서당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한국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선생은 종형 문우목에게 어린 딸을 맡기고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하와이로 망명길을 택하였다. 하와이에서 사탕노동자로 근무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1907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보국회를 결성하여 회장직을 맡았다. 또한 대동공보 신문의 사장직도 맡아 국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국권회복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강력한 항일운동지로 위상을 키웠다.  

우운 문양목 선생은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미국에서 항일운동을 했다. [사진=국가보훈처]
우운 문양목 선생은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미국에서 항일운동을 했다. [사진=국가보훈처]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한인민족운동단체였던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共立協會)는 공동회(共同會)를 개최하고 스티븐스의 망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때 문양목 선생은 직접 스티븐스를 방문하여 관련 기사의 정정과 해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티븐스가 이를 거절하자 공립관(共立館)으로 돌아와 사건전말을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스티븐스 처단을 위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1908년 3월 23일 전명운(田明雲)·장인환(張仁煥)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處斷)하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제2차 공동회를 개최하고 전명운·장인환의사 재판후원회를 결성하여 지원하였다. 

이외에도 선생은 한국 최초의 독립군사관학교에 설립에 참여하고 대동신서관이란 출판사를 설립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필요한 책자를 간행하였다. 이 때 선생이 출간한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이승만의 '독립정신'과 박용만의 '군인수지' 등이 있다. 

그러나 치열한 항일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제점령하였다. 선생은 독립군양성운동과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뜻을 밝히며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에 '신한국 건설책은 국민단체를 완전하게 하는데 있을 따름이다'라는 글과 '국민단체완전책'이란 논설을 투고하였다. “만일 우리가 새한국을 건설치 못하고 보면 저자들보다 죄가 적다 할 수 없으니 우리의 급히 예비할 바는 조국을 회복할 정책이다. 국민의 단체를 완전히 해야 한다.  ···우리 일반국민의 내외단체를 완전히 하여야 사람마다 망국한 죄를 속하고 신한 건국의 일등 영웅이 될 줄로 믿고 축수하노라."

문양목 선생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로 이승만이 착수하는 서적발행과 학생기숙사 건축 및 총회관건축 및 세세한 제반 사항들을 동포의 의연금에 의지할 수 없다는 어려운 상황을 전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문양목 선생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로 이승만이 착수하는 서적발행과 학생기숙사 건축 및 총회관건축 및 세세한 제반 사항들을 동포의 의연금에 의지할 수 없다는 어려운 상황을 전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맨티카 지방에 국어학교를 개설하고 교장으로 재직하여 한인아동들에게 민족교육을 하였다.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중견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21년 10월 '산지조종 태백산'이라는 시를 남겼다. "···태산같이 뜻을 세워 사욕탐심에 요동마라. 위국진충 하량이면 영웅호걸 그 뿐이로다. 산에 올라 바라보니 형식문명 굉장하다. 강식약육 험한 시대 청년들아 전진하라. 내나도 네나도 단군의 자손." 
  
선생은 꿈에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0년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